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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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 - 1922년 5월 19일)는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본래 이름은 손응구(孫應九)이며, 망명 중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 최시형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882년 동학에 입도했으며,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무너진 조직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최시형은 이듬해 처형당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의 우두머리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해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서도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천도교를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졌고, 손병희는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서 이들과 결별한다.
귀국 후에는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과 출판 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인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저서로는 일본 망명 시절에 국부 달성과 근대화를 주장하며 저술한 《삼전론(三戰論)》(1902), 《명리전(明理傳)》(1903) 등이 있다.
어린이 운동으로 유명한 방정환이 손병희의 사위이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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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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