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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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는 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며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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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본관은 반남(潘南).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1872년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1]
1882년의 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2]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5년 갑오경장으로 사면되어 귀국했다.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고종 양위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원을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일본 귀족원 의원(1932)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3]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하였다.
[편집] 후손과 묘
박영효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박흥원(朴興元)은 불가에 귀의해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흥원의 아들 혜륜(彗輪) 역시 승려이다. 범씨의 딸 묘옥(妙玉)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씨와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4]
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환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5]
[편집] 저서
- 《사화기략》(使和記略)
[편집]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편집] 각주
- ^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돌베게, 1993년) 119쪽(윤해동 집필 부분)
- ^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39쪽.
- ^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43~44쪽.
- 《주간조선》, 1833호, 2004년 12월 16일.
조선인 일본 귀족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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