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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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權東鎭, 1861년 12월 15일 - 1947년 3월 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아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며, 천도교에서 받은 도호(道號)는 실암(實菴)이다.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어릴때 서울로 이주하여 조선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서 벼슬을 지내다가 개화파에 참가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오랜 기간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만났다.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의기투합한 손병희, 오세창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계속했으며, 1907년 남궁억의 대한협회에도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을 주도했다. 각계에서 민족대표를 선출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한다는 3·1 운동 초기 구상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의 천도교인 네 사람의 의논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27년 좌우익 계열을 망라한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집결체인 신간회를 조직했다. 회장은 이상재였고 권동진은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조병옥 등과 함께 연행되어 또다시 1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원로로서 반탁 운동에 참가했으며,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냈다. 신한민족당은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김구의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게 된다. 1946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반탁 세력을 집결시켜 임시 입법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을 구성했을 때 의원으로 위촉되었으나, 이때 이미 86세의 노령이었고 다음해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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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분류: 1861년 태어남 | 1947년 죽음 | 한국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