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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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金秉祚, 1877년 1월 10일 ~ 1950년 9월)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일재(一齋).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을 하던 중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3년 근대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17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에 유여대 등 장로교 인사들과 함께 선천의 목사 양전백 집을 방문하여 이승훈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3·1 운동 거사 계획을 듣게 된다. 이미 서울에서 천도교 지도자들과 연대에 합의하고 돌아온 이승훈의 권유로, 김병조와 유여대, 이명룡과 양전백은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북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1920년)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으로도 근무한 그는 독립운동 자료의 수집과 편찬에 관심을 두고 1924년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발간했다.
1923년부터는 상하이를 떠나서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분위기 때문에 공식 활동을 접고 정주의 묘두산 기슭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게 된다.
광복 직후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1946년 겨울 체포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그에 대한 저술로는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김형석 편저, 1993년)이 있으며, 차남이며 목사인 김행식이 2002년 《김병조 평전》을 펴냈다.
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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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분류: 1877년 태어남 | 1950년 죽음 | 한국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