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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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崔麟, 일본어: 佳山麟, 1878년 ~ ?)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인사이다. 아호는 고우(古友)이며, 천도교 도호(道號)는 여암(如庵)이다.
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유하던 중, 1902년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일심회(一心會) 조직 사건으로 일본으로 잠시 피신했다.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당시 일심회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다.
1904년에는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의 부립제일중학과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1910년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같은 황실유학생이었던 최남선,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교류했고, 이후 천도교에 입교했다.
보성고보 교장을 지내면서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18년부터 손병희와 오세창, 권동진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의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을 구상했다. 그는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들을 참가시키고 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후에는 손병희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천도교가 내분 상태에 빠지자,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였는데, 결국 193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해 일선융합(日鮮融合)과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을 맡으며 강연 활동 등으로 전쟁을 지원하는 극렬 친일 인사가 되었다.
광복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납북된 뒤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친일파 목록 중 중추원, 언론분야, 종교분야, 친일단체, 전쟁협력 등 다섯개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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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 편집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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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
분류: 사람 토막글 | 1878년 태어남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