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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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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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863년 ~ 1907년 | |
왕 비 | {{{왕비}}} |
황 후 | 명성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철종 |
다음 왕 | 순종 |
조선의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
고종(高宗, 1852년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 재위 1897-1907)이다. 본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皇帝). [1]
목차 |
[편집] 생애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이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2세에 즉위하였다.[1]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섭정을 하기 수월해서이다. 즉위 후 10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 미국(1871)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겼으며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나고,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정은 개항을 가속화하였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1885-1887)하는 사건이 잇달았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고종은 김홍집 등 중도 개화파를 등용하여 갑오개혁을 시행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홍범 14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화의 문을 열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명성황후가 러시아와의 접근을 시도하는 등 일본을 공공연하게 자극하다가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건의로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으로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일본은 1904년-190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 정부에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 (고종 양위 사건 참조.)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화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이 성립되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를 놓고 항간에 독살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실제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고종은 한일 합방 이후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근거없는 주장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독살설 참조.)
[편집] 가족 관계
부인
호칭 | 이름 | 출생 | 사망 | 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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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 민자영 | 1851년 | 1895년 | 4남1녀 |
순헌황귀비 | 엄씨 | 1854년 | 1911년 | 1남 |
영보당귀인 | 이씨 | 1남 | ||
귀인 | 장씨 | 1남 | ||
광화당귀인 | 이완흥 | 1887년 | 1970년 | 1남 |
보현당귀인 | 정씨 | 1남 | ||
복녕당귀인 | 양씨 | 1녀 | ||
내안당소의 | 이씨 | 1녀 | ||
삼축당상궁 | 김옥기 | 1890년 | 1972년 | X |
정화당상궁 | 김씨 | X | ||
상궁 | 염씨 | 1녀 | ||
상궁 | 서씨 | X | ||
상궁 | 김충연 | X |
자식
순서 | 이름 | 출생 | 사망 | 생모 | 자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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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완친왕 | 1868년 | 1880년 | 영보당 이씨 | X | |
2남 | 없음 | 명성태황후 | X | 4일만에 사망 | ||
3남 | 순종 | 1874년 | 1926년 | 명성태황후 | X | |
4남 | 없음 | 명성태황후 | X | 14일만에 사망 | ||
5남 | 의친왕 | 1877년 | 1955년 | 귀인 장씨 | 12남9녀 | |
6남 | 없음 | 명성태황후 | X | 105일만에 사망 | ||
7남 | 의민태자 | 1897년 | 1970년 | 순헌황귀비 | 2남 | |
8남 | 황자 육 | 1914년 | 1915년 | 광화당 이씨 | X | |
9남 | 황자 우 | 1915년 | 1916년 | 보현당 정씨 | X | |
1녀 | 없음 | 명성태황후 | X | 222일만에 사망 | ||
2녀 | 없음 | 내안당 이씨 | X | |||
3녀 | 황녀 문용 | 1900년 | 1987년 | 상궁 염씨 | 1남 | |
4녀 | 덕혜 옹주 | 1912년 | 1989년 | 복녕당 정씨 | 1녀 |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 대한제국 황실 종묘제례 주관 공식 단체. 조선왕실계보, 선원계보(황실 족보) 등
[편집] 참고 문헌
- ^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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