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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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1775년 ~ 1783년)은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애서 건국했다고 보며,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목차 |
[편집] 원인과 배경
[편집] 경과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많은 돈을 써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영국과 전쟁에 나섰다.
[편집] 결과
[편집] 요크타운과 전쟁의 끝
[편집] 사상자
미국 독립 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전쟁들처럼,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천연두가 만연한 가운데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 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약 25,000 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 중에 죽었다. 그 중 약 8,000 명은 전사했다. 17,000여 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그 중 8,000 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약 8,500명에서 25,000 명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 명 정도까지 추정된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50%는 강제 징집되었다. 1,240 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가장 큰 원인은 괴혈병이었다. 레몬 쥬스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전쟁중 약 42,000명의 해군이 탈영했다.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 합중국에 잔류했다. 대부분 미 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다른 부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미국의 독립혁명
영국 본국의 가혹한 지배와 중상주의 정책에 반항하여 미국 13주(州) 식민지가 합력하여 독립을 달성한 전쟁과 식민지 내부의 사회개혁을 포함한 혁명
이 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며, 사회개혁은 그에 따라 행하여진 것으로, 후의 프랑스혁명 등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형태를 타도하고 보다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수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혁명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란이며, 또한 같은 영국인 사이의 싸움으로서 내란으로 볼 수도 있다.
1. 원인
1760년 조지 3세가 국왕이 되기까지는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과거 1세기 이상 식민지는 각각 식민지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자치도 허용되어 있어 식민지의 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의 식민지 정책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따라서 식민지인의 본국에 대한 항쟁은 종래의 권리•자유•특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763년 7년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조약에 의하여 미국 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가 소멸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본국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첫번째 시도가 1763년에 발표된 국왕선언(國王宣言)이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식민지인은 인디언과 통상을 할 수 없으며 동부의 앨러게니 대지(臺地) 서쪽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치안유지와 법률 시행 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분담이 강요되었다.
영국 본토의 다음 정책은 중상주의 강화 겸 세입증가를 위한 정책으로서 이것도 식민지인의 이해와 대립되고, 종래의 관행(慣行)을 깨뜨리는 처사였다. 그렌빌 내각은 지금까지 묵과해온 밀무역(密貿易)의 단속을 강화하고 관세징수를 엄중히 시행하고자 1764년 설탕조례(條例)를 시행하였다. 다시 1765년에는 인지조례(印紙條例)를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상인•저널리스트•변호사•목사 등 모든 계층이 ‘대표(代表) 없는 곳에 과세(課稅)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17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되었으나 타운센드 제법(諸法)이 이에 대신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였다. 1765년에 제정된 군대숙영법(軍隊宿營法)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은 70년의 보스턴학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772년 청원에 의하여 어려움을 제거하려는 방법이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각지에 통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비합법의 반항운동에 들어갔다.
1774년의 보스턴 차사건(茶事件)에 대하여 본국이 보스턴항(港) 봉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 정지 등을 포함하는 징벌적인 여러 법을 부과하게 되자 식민지 쪽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法)’으로 규정, 버지니아의 제창으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권리와 호소(呼訴)의 선언’이 채택되고, 국왕에게 1763년 이후 취하여진 탄압조치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해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 지역을 확대, 이 지역의 프랑스인을 위하여 가톨릭교를 승인하였다.
식민지인들에게 이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국왕이나 의회는 식민지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식민지에는 자치가 행하여지고, 자유가 대폭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자기들의 자유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경과
1775년 4월 미국 보스턴의 서쪽 교외 렉싱턴과 콩코드 부근에서 최초로 영국군과 급진파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에 제2회 대륙회의가 서둘러 소집되고, 식민지인의 권위 아래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며 워싱턴을 식민지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사적으로 약세인 식민지군이 승리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최초에는 해군은 전혀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가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장기전(長期戰)에 견뎌낼 수 있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 워싱턴은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였다.
7년 동안에 식민지군의 병력은 대체로 40만에 가까워졌으나 워싱턴은 한꺼번에 2만 1000 이상의 병력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혁명전쟁 당시 식민지인의 1/3은 본국 지지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76년 1월 T.페인의 팜플렛 《커먼센스》가 나왔는데, 그는 여기서 국왕과 군주제(君主制)를 공격하고, 식민지인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 팜플렛은 식민지인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굳게 하였다.
이처럼 식민지인의 높아가는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1776년 7월 4일 제퍼슨이 기초(起草)한 독립선언이 대륙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자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계약에 의해 정부를 세우며, 그 정부가 기본 인권을 범할 때 국민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혁명권(革命權)을 주장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였다. 독립선언은 독립 달성에 필요한 군사적 원조를 얻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 패하여 식민지 제국(帝國)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혁명 원조의 정당화를 위하여서도 독립을 권고하였다.
전쟁 중 식민지측은 재정의 곤란으로 통화를 증발(增發)하고, 공채(公債)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B.프랭클린, J.애덤스의 활약으로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지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있었다. 영국의 작전은 허드슨강에서 식민지를 양단하는 것이었으나, 식민지군은 77년 새러토가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는 독립전쟁의 대세를 일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새러토가전투를 계기로 식민지측의 승리를 예상하고, 78년 미국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다른 유럽 제국도 80년에는 무장중립동맹을 조직하여 영국을 견제하였다. 무력하였던 식민지군 해군도 80년 이후에는 프랑스 군함의 응원으로 영국군과 대항하게 되었다. 식민지군은 자체의 과감한 전투력과 함께 외국의 원조로 영국군을 추격, 81년 육 •해군이 요크타운을 포위하여 10월 영국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독립전쟁은 끝났다.
영국측은 전쟁에 지쳐 82년 평화를 원하게 되었으며, 교전 각국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아 강화조약은 시간이 걸렸으나 83년 파리조약이 성립되었다. 영국은 이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동 •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五大湖)까지 이르는 광대한 미국영토가 확정되었다.
3. 의의
미국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국왕을 지지하던 많은 식민지인이 추방되어 영국 본토, 캐나다 또는 서인도제도로 도피하였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 재분배되었다. 또 이것을 계기로 북부 여러 주는 노예를 해방하고,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 등의 봉건적 잔재를 폐지하고, 많은 주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독립혁명군에 의하여 공화제(共和制)가 실시되었으며,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에 의한 사회개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세기 전반에는 남자보통선거도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잭소니언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아 독립혁명•사회혁명의 이상(理想)도 달성되었다.
[편집] 주요한 전투
렉싱턴전투 [Battle of Lexington]
1775년 봄 영국 본국의 식민지정책에 반항한 애국파(愛國派)가 매사추세츠 식민지 보스턴 근방의 콩코드에 무기와 탄약을 비치하였다.
이 사실을 알아낸 보스턴 주둔 영국 본국군사령관 T.게이지는 4월 18일 렉싱턴에 있는 애국파 지도자의 체포와 무기고 파괴를 위하여 F.스미스 대령이 인솔하는 정규군 약 7,000명을 4월 19일 새벽 콩코드로 출동시켰다. 애국파의 P.리비아, W.도즈의 급보로, J.파커가 이끄는 민병은 영국군 선발대를 렉싱턴에서 맞아 싸웠다. 이때 8명의 민병이 전사함으로써 독립전쟁 최초의 희생자가 생겼다. 이어 콩코드에 진출한 영국군 본대를 320~400명의 민병이 공격하여 콩코드강(江) 다리 위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영국군은 증강된 민병의 공격을 받아 후퇴, 간신히 귀환하였다. 단 하룻동안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민병측 95명, 영국군측 273명이나 되었다. 이 전투로 영국군은 패퇴하고,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벙커힐전투 [Battle of Bunker Hill]
렉싱턴과 콩코드전투의 승리 뒤 2개월 만에 일어난 전투로서, 미국 독립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일 밤~17일 새벽에 미국 민병대가 보스턴항구 일대를 점거한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식민지군 민병대가 패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에게 2배 이상의 손해를 입혔으며, 장비 •훈련이 뒤떨어진 독립군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안겨주어 저항감을 크게 자극하였다. 결국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궁극적인 승리로 이끌어나가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린마운틴보이스 [Green Mountain Boys
미국 독립전쟁 때 활약한 애국 민병대를 말한다. 애팔래치아산맥의 지맥으로서 버몬트 지방에 있는 산지를 그린마운틴스라고 한다. 1770년 현재 버몬트 주의 베닝턴에서 조직되었다. 1767년 버몬트가 뉴햄프셔주의 식민지였다가 땅을 양도받아 독립하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뉴욕에서 보안관 무리를 보내 공격했다. 그린마운틴보이스는 이선 앨런의 지휘로 이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땅을 지켰다.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후 1775년 5월 10일, 앨런과 베네딕트 아놀드가 지휘하던 이 단체는 처음으로 과격한 공격을 실시하였고 대원 100명과 그밖의 사람들 100명이 타이콘더로가 요새를 탈환했다. 1777년 8월 4일 존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영국 군대가 베닝턴을 공격해 무기고를 습격하고 식량을 얻으려 했으나 그린마운틴보이스가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새러토가전투 [Battles of Saratoga
제1차 전투에서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남쪽으로 이동해 올버니로 진격하였다. 특히 두 번째의 전투에서 H.게이츠 장군 지휘하의 미국 독립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J.부르고뉴 장군 이하 약 6,000명의 영국군을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계기로 독립군의 사기가 올라 전세(戰勢)가 역전되고, 또 관망 태도를 취하던 프랑스가 이 승전에 자극되어 참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새러토가국립사적공원(國立史蹟公園)이 있다.
몬머스전투 [Battle of Monmouth Court House]
미국 독립군 장군 C.리는 총사령관 G.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가던 장군 H.클린턴 지휘하의 영국군을 기습하다가 실패하고, 후위대 C.콘월리스의 반격을 받았다. 워싱턴은 전장에 도착하자 즉시 군대를 재편성하여, 콘월리스를 무찌르고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하였다. 콘월리스는 교묘히 후퇴하여 본대(本隊)와 합류, 뉴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패배한 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지휘권이 박탈되었다. 결국 양군은 2년 전의 위치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요크타운전투 [Battle of Yorktown]
1781년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 본국군이 뉴욕으로부터의 지원군 및 해상으로부터의 함대의 원조를 기대하여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으로 물러났을 때, 워싱턴의 식민지군은 육상에서 이를 포위하고 해상에서는 프랑스함대가 출격하여 영국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식민지군이 승리했다. 이와 같이 식민지군의 군사적 승리를 확정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싸움이다
미국 독립의 원인(遠因)으로는 먼저, 식민지의 주체적 독립 조건을 갖추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미국에서는 민주 제도가 발전하였고 독립 자유 정신이 충일했으며 많은 전쟁 경험을 통해 통합의 기운이 있었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군사적 자주성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본국의 중상주의 정책의 가혹성을 들 수 있다. 영국는 미국에 대해 여러 가지 규제를 가하여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였는데 그 예로 1764년에는 전비 보충을 위해 Sugar Act를 제정하여 설탕을 비롯한 당밀을 서인도 제도의 쿠바등지로부터 수입할 때 관세를 붙였다. 이는 제조업자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는데 특히, 양조업자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리고, 1765년에는 둔영법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식민지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주둔비를 부과시킨 것이었고 같은 해에 직접세법인'Stamp act'를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지식층의 반발을 받았다.
이러한 영국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먼저 지식인들과 상인들이 반발하여 "No Taxtation without Repersentation"(대의원 없이는 세금(과세)도 없다. 우리의 대표가 없는 곳에는 과세권이 없다.)이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그리고, 실제적인 운동으로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과 불수입 운동이 일어나 과격한 행동으로 반대 운동을 펼치고(린치를 동원한 Tar and Feather 운동) 직접세에 대한 항세 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Stamp Act가 폐지되고 1767년에 그 대신 Townschend Act가 제정되었는데 이것은 국가의 세입을 징수하게 위해 간접세로 전환된 것이었고 임금 영장제도를 발행하여 세금을 내지 않는 자에게 구속과 탄압을 가하여 반대를 받고 1770년에 폐지된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식민지와 본국사이에 충돌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러한 세금으로 인한 다툼 속에서 영국은 1773년에 세금 부과 권리는 본국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Tea Act를 제정한다. 이것의 내용은 중국과 인도에서 활동하는 동인도 회사의 재정 지원을 목적으로 관세 없이 식민지에서 차를 팔수 있게 하였다. 이 법안은 식민지인들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들은 다시 간접세의 성격을 지닌 Tea Act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세금 부과의 권리는 본국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한편 1773년 12월에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사무엘 아담스란 사람이 50명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 보스턴 항에 정박중인 동인도 회사 선박에 인디언을 가장하고 접근하여 342상자의 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본국에서는 강격책을 써서 결국 이것은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본국에서 행한 강격책은 불관용법 5개를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제 1법령은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차값을 배상하게 하는 것이었고 2법령은 메사추세스의 특허장을 폐지하여 이 지역을 자치주가 아니라 직속령이 되게 하는것 그리고, 3법령은 일체의 시민 집회를 금지하고 사형자로 고소된 자는 본국으로 소환하는 것, 4법령은 메사추세스의 각 도시는 이 법령의 시행을 위해 파견되는 군대를 부양하는 것 5법령은 미시시피강 서쪽의 카톨릭 교도들에게 시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법령은 당시 미국에서 청교도와 카톨릭 교도가 대립하고 있어 미국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되었고 이 법령과 함께 영국은 미국에 많은 군대를 파견하고 식민지에서도 강경하게 대응한다.
독립 전쟁의 근인(近因)으로는 먼저, 1774년 9월 5일에 있었던 제 1차 대륙회의(1st Continental Congress)가 있다. 이 회의에는 조지아주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는데 참석자로는 메사추세스주에서는 존 아담스와 사무엘 아담스가 버지니아주에서는 조지 워싱턴과 패트릭 헨리등이 참석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독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 대신 식민지는 영국인으로서 생명 지위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으므로 식민지 의회가 입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본국과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벌이고 필요하면 1775년 봄에 제 2차 대륙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은 차값을 배상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고 식민지는 불관용법을 폐지하지 않는한 어떠한 배상도 없다고 주장하여 Lexington과 Concord에서 1775년 4월 19일에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 이 충돌은 보스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본국의 군대와 식민지의 군대가 부딪친 사건이었는데 다시 5월에는 Triondery에서 충돌이 있게 된다.
제 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에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과격파와 온건파가 대립을 하게 되었는데 온건파가 다수였으며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6월 17일에 Bunker Hill에서 충돌이 있었는데 그 결과 식민지에서는 450명 그리고 영국군에는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조지 3세는 식민지의 반란을 선언하면서 해상을 봉쇄하고 만명의 독일 용병을 식민지에 파견한다. 그리고, 독립군은 프랑스, 스페인 등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런데, 1776년 봄까지 식민지에서는 전쟁을 원치 않았으나 차차 독립 성언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제퍼슨이 {Common Fense}라는 저술을 출판하여 독립을 부추기게 된다.
1776년 6월에 독립선언서 기초 위원을 위촉하고 7월 1일에는 분리 독립하였으며 7월 4일에 독립 성언서의 승인을 받고 State Mouse(Independent Hall)에서 자유의 종을 울리게 된다. 독립선언서는 제퍼슨이 거의 혼자 기초하였는데 2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독립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것을 호소했으며 국왕 조지 3세를 매도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선언서에서는 국민에게 권리가 있다는 새로운 정치 이론이 등장했으며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삼권 분립과 민주주의 이론을 천명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식민지에게 유리한 점은 전쟁터가 영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활한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영국과의 사이에는 대서양이 가로 놓여있다는 것, 불요불굴의 의용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유능한 군사 지도자가 있었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동맹군이 잇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불리한 점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군대와 군비가 준비되지 못 했으며 식민지 내부에서도 다툼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해군력이 약소했다는 것이다.
1777년 10월까지는 식민지 군대가 불리하였는데 10월 17일에 뉴욕의 북부인 Saratoga에서 식민지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 승리가 알려지면서 동맹국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는데 벤자민 프랭클린이 교섭한 결과 프랑스 군대가 참전하게 되고 1779년부터 스페인,네덜란드등이 지원을 하게 된다. 1780년 5월 28일에 영국군이 식민지 남부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1781년에 버지니아의 York Town에서 영국군은 대패를 하고 Lord Connwallis 장군이 항복한다. 이로서 1783년에 파리 강화조약이 맺어지는데 미시시피강 동쪽의 13개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미국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 기념일 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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