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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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동계 전쟁,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계속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스탈린은 1939년 말까지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숫적으로 소련군과 비교할 수 없는 열세한 전력을 가진 핀란드군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버텼으며 이때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10%정도(산업능력의 20%에 해당)를 소련에게 넘겨주었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을 면했다.
겨울 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스칸디나비아 북쪽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논의를 공공연히 하여 나치 독일이 개전 1개월도 안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베저 작전). 또 소련군이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부진이 아돌프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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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핀란드에게는 1808년 제정 러시아 땅이 될 때까지 스웨덴 왕국의 일부로서 긴 역사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는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¹ 나치에 대한 호감은 거의 없었다. 반면 19세기말-20세기초 핀란드에 대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으로 이어진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 시도 때문에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언젠가는 소련을 침공한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독일이 핀란드 영토를 통해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을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소련과 독일은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동유럽 여러 나라의 영토를 양국이 나눠 갖는다는 비밀 조항도 포함했다. 핀란드는 이때 소련의 "이해권"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 독일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은 동쪽으로부터 침공해 수주만에 폴란드는 양국이 합의한대로 분할되었다. 이웃한 나라들은 자신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을 깨달았다. 1939년 가을 스탈린은 핀란드와 발트 3국에게 그들 영토에 소련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할 것을 강요했다. 방위의 목적이란 구실이었다. 핀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자 소련군은 11월 30일 45만명으로 이루어진 23개 부대로 핀란드를 공격,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다. 전쟁은 국경지대에서 소련군이 자국군에 발포한 후 핀란드의 공격이라 꾸며대어(일명 "마이닐라 발포") 이를 구실로 발발했다. 이것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소련측의 옛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소련군이 차지한 국경지대의 마을인 테리요키(Terijoki; 현 젤레노고르스크 Zelenogorsk)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적인 목적(소련은 즉시 이 정부를 핀란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과 군사적인 목적(핀란드군의 사회주의자들을 회유하려 했다)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러시아 소속 카렐리야-핀란드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편집] 전쟁
핀란드가 동원한 군대는 초기에 병력이 16만명에 불과하였지만 게릴라식 전투와 흰 보호색 군복을 입은 기동력이 좋은 스키부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기초해 즉석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화염병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소련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 칵테일이라 불려졌다. 1939-40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해 -40°C 수준의 온도가 보통이었으며 이는 핀란드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 소련과 핀란드 양쪽의 당초 예상과 달리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자국민들과 나란히 소련군을 싸웠다. 다수의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소련에 가서 "사회주의 건설" 작업에 참여하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바 있어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겨울 전쟁은 1918년 핀란드 내전으로 표면화된 이념 갈등과 스웨덴어 사용자들과 핀란드어 사용자들 간의 언어 갈등 등 핀란드 내부의 분열을 상당 부분 치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핀란드 국민들이 보인 단합 정신은 아직도 "겨울 전쟁 정신"이라 불린다. 다만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사상으로 인해 이때 핀란드의 징병군으로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언급되어야겠다.
겨울 전쟁에는 소련의 자만과 무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은 그리 큰 저항을 예상하지 않았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관들이 80%가 평화시에 희생당했었다. 이들은 보통 무능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1차대전때 이미 구식이 된 작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칫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과서적인 작전만을 고집했다. 또 겨울에 벌이는 전쟁, 특히 삼림 지대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핀란드군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이들이 대량 사용한 군용 차량은 이같은 조건에 매우 취약했다. 소련군의 한 부대가 핀란드 복병들로 둘러싸인 곳에 제발로 진주해 전멸당한 "라텐티에 사건(Raatteentie Incident)"은 지금도 군사학에서 절대 범하면 안될 중대한 실수의 예로 많이 쓰인다.
이 당시 소련군 편제는 2차대전 중에 확립된 편제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숙청 이후 살아남아 고위 장성이 된 장교들은 숙청에 대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대단위 야전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대령급 이상 고위 장성의 70%가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빈 자리는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이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위로 중대를 지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단을 지휘하게 되고 상관이나 동료들도 대부분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전 지휘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만 해도 아직 전차부대, 항공기, 포병, 보병, 공병 간에 역할이 분명하면서도 잘 협조할 수 있는 전술교리를 갖지 못했다. 장교들의 지휘 능력 문제와 더불어 새로운 현대전에 어울리는 전술교리를 숙지못했다는 점도 소련군이 초전에 대패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 대부분 군사 강국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로, 19세기적 전쟁 방식과 전술 교리에서 전차와 비행기로 대표되는 현대 전술 교리로 전환되는 과도기여서 어느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현대적인 기동전과 전술교리를 개발해서 적용한 군대가 독일군이었지만, 그들의 전술교리도 1940년 서유럽 전역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아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술교리를 채택하고 있었고, 독일의 폴란드 및 서유럽 침공과 소련군의 겨울전쟁 교훈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된 현대전 전술교리를 갖게 되었으니, 소련군을 무능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독일군이 서유럽에 침공했을때, 프랑스군과 영국군도 이 당시 소련군 못지 않은 실수를 연발했고, 독일군에 호되게 당한 이후에야 겨우 새로운 전술교리를 채택하게 된다.
핀란드의 장비 부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에는 기초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옷에 적당히 표장을 하였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들쭉날쭉이 된 "군복"에는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의 이름을 따 "카얀데르 모델"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핀란드군은 적군에게서 탈취한 장비·무기·탄약으로 부족한 장비를 충당하려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소총을 바꾸지 않아 소련군의 소총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모신-나강 소총을 사용했다).
[편집] 외국의 지원
세계의 여론은 핀란드 편이였다. 세계대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 전쟁은 당시 진행되던 유일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침공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 인구는 핀란드에 돌아갔으며 외국에서 많은 수가 핀란드에 가서 지원병으로 싸웠다(나중에 배우로 유명해지는 크리스토퍼 리도 이때 지원). 스웨덴은 이때만큼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군수품과 현금, 신용, 인도적 지원을 핀란드에 해주었다. 8700명의 스웨덴인 지원병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핀란드군의 독창력과 성공에 대해 때로는 크게 과장되게 보도를 하였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채 안되어 소련의 지도부는 작전 포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월말이 되어서야 핀란드 정부에게 스웨덴 정부를 통해 예비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그때까지 핀란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이 평화 제의 소식이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알려지자 핀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의 동기는 크게 변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주변 자국 영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 "뿐"이었다. 물론 핀란드와 외국의 일반 국민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핀란드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 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페르 한손(Per Albin Hansson)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영국군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국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스웨덴 내각은 또 핀란드가 여러 차례 요청한 스웨덴 정규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에는 장비와 탄환 지원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핀란드는 전쟁이 지속되기를 희망한 연합국들과 전쟁이 자국까지 퍼지는 것과 핀란드 패전의 경우 난민 발생을 우려해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희망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외교적으로 입지가 좁았다. 독일 역시 평화 협정을 체결하라는 권고를 했다(협정에서 양보된 것은 나중에 충분히 다시 차지할 수 있다면서).
2월말 핀란드의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Carl Gustaf Mannerheim)은 군사 상황 전개가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정부가 2월 29일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날 소련군은 비푸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핀란드가 평화 협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와 영국이 알게 되자 그들은 재차 지원을 제의했다. 이번에는 핀란드가 3월 12일 이전 지원을 요청한다는 조건하에 50만 병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병력 중 6천명만이 핀란드에 투입될 계획이었으며 나머지는 스칸디나비아 북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는데 쓸 생각이었다.
[편집] 정전 협정
겨울이 끝나면서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뗄 의향이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의 대표들은 핀란드에게 소련과 협정을 할 것을 권했다. 소련군은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냈으며 소련 정부에게 이는 큰 국제적 망신거리였다. 봄이 오면서 해동으로 소련군이 삼림 지대에서 자칫 수렁에 빠질 상황에 놓였다. 그리하여 2월 12일 평화 조항 초본이 핀란드에 전달되었다. 독일 뿐만이 아니라 스웨덴도 핀란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겨울 전쟁이 빨리 종전되기를 희망했다. 핀란드에 극히 불리한 조항을 받고 핀란드 내각이 망설이는 동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의 스웨덴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월말이 되자 핀란드군의 탄환은 바닥이 났다. 소련군은 그때까지 많은 사상자만 내면서 넘지 못해던 만네르헤임 선을 뚫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 1940년 3월 6일 양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이후에도 전투는 간간히 계속되었다). 4개월간의 전쟁 후 소련군에서는 최소 12만7000명이 사망하였다[1]. 핀란드군은 2만7000명 정도의 사망자밖에 내지 않았지만[2] 핀란드는 많은 것을 잃었다.
[편집] 모스크바 평화조약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통해 핀란드는 제2도시 비푸리(Viipuri)를 포함한 공업 중심지인 핀란드령 카렐리야(핀란드어로 카리알라)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협상 당시 많은 부분을 핀란드군이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이는 핀란드 영토의 10% 가까이 되었다. 핀란드 인구의 약 12%인 42만2000 카렐리야인들은 거주지를 잃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 영토가 된 지역에 있던 핀란드군과 민간인들은 속히 대부분 핀란드로 대피되었다.
핀란드는 이외에도 살라(Salla) 지방과 바렌츠 해의 칼라스타얀사렌토 반도(Kalastajansaarento peninsula), 핀란드 만의 섬 4개를 소련에 넘겨야 했다. 항코(Hanko) 반도도 소련에 군사 기지로 30년간 임대되었다.
핀란드 국민들은 가혹한 평화 조약 조항에 당혹했다. 전쟁에서 잃은 영토보다 평화로 잃은 영토가 더 많은 듯 했다. 국제 여론, 특히 스웨덴의 동정은 무의미했다. 그리하여 핀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소련에 대한 복수전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1년 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 전쟁은 재개되었다.
[편집] 주요 전투
- 수오무살미 전투
- 톨바야르비 전투
[편집] 관련 항목
- 핀란드의 역사
-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 핀란드화
- 로타 스베르드 (Lotta Svärd)
주:
- 핀란드의 독립 운동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립을 뒤따른 핀란드 내전에서는 독일에서 훈련된 핀란드 저격사단(Finnish Jaeger troops)과 독일 정규군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전까지는 독일인을 핀란드 왕(배이뇌 1세; Väino I)으로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 및 전선 |
유럽 전선 |
폴란드 | 가짜 전쟁 | 덴마크와 노르웨이 | 프랑스 및 베네룩스 | 영국 |
동부 전선 1941년 ~ 1945년 | 계속 전쟁 | 서부 전선 1944년 ~ 1945년 |
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 |
중국 | 태평양 | 동남아시아 | 남서 태평양 | 1945년 만주 |
지중해, 아프리카 및 중동 |
지중해 | 동아프리카 | 북아프리카 | 서아프리카 전역 | 발칸 반도 중동 | 마다가스카르 | 이탈리아 |
기타 |
대서양 | 전략 폭격 | 북아메리카 폭격 |
동시대 전쟁 |
국공내전 | 소련-일본 국경 분쟁 | 겨울 전쟁 | 프랑스-태국 전쟁 | 영국-이라크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