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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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편집] 생애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 하였다. 당시 폭탄은 김웅에 의해 폭탄투척의거에 적합한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두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하였다. 홍커우공원에서의 의거를 실행한 윤봉길은 일본 천황 살해에는 실패했으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리카와,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을 죽이고,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다. 의거 직후 체포,사형을 선고 받고 오사카로 후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총살 당했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에 대해서 "중국 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면서 찬양했다고 한다.
[편집] 사형 순간
-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 요란한 총성이 음침한 겨울안개를 뚫고 작업장에 울려퍼졌다. 형틀에 묶인 사형수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편집] 뒷 이야기
-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구에게 거사 직전에 “선생님의 시계보다 제 시계가 더 비싼 것인데, 저는 이제 몇 시간만 시간을 더 보면 되니 시계를 바꾸어 찹시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스스로 쓴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그의 마지막 사진은 독립기념관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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