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 군부독재 정권이 통치하고 있던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2개월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다.
목차 |
[편집] 배경
아르헨티나가 "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이 섬은 1690년 영국의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상륙하고 1764년 프랑스의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이 처음으로 정착민을 데려와 살게했다. 1766년에는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영국 정착촌이 세워졌고 프랑스 정착촌을 넘겨 받은 스페인과 영국이 1771년 전쟁을 벌일 뻔 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철수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주변의 스페인 땅은 모두 아르헨티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1820년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1831년 미국 포경선을 나포한 보복으로 유일한 정착촌이 미국해군함 렉싱턴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했다. 그 후 1833년 영국이 이 섬을 접수했다. 그 후 150여년동안 아르헨티나가 이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영국과 갈등을 빚어오기는 했지만, 1982년에 아르헨티나군이 무력으로 점령한 것은 영유권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행해진, 내부 문제를 외부의 위기로 해결하려는 고전적인 정치 수단의 일환이었다. 즉, 인플레이션과 실업, 정치혼란(반독재투쟁)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 정부가 남대서양의 끝에 있는 별볼일없는 섬에 무력으로 개입할 것같지는 않다는 판단도 무력 점령을 시도한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은 해병대 코만도 소속 수십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포로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영국인의 시각에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태도에 영국 여론은 자국 영토가 침탈당했다는 자존심의 상처와 더불어 강경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편집] 경과
- 4월 02일 :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등 3개 제도에 대한 무력점령; 영국의 항의, UN의 중재노력; 영국, 기동부대 파견 결정
- 4월 26일 : 영국의 대규모 기동부대와 아르헨티나군간 전투; 영국, 남부조지아(South Georgia)섬 탈환
- 5월 02일 : 영국, 아르헨티나 전투함 General Belgrano를 격침
- 5월 21일 : 영국, 카를로스(San Carlos)섬 상륙
- 6월 14일 : 영국, 스텐리항(Port Stanley)을 탈환/포클랜드 주둔 아르헨티나군 항복
[편집] 결과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은 내부의 위기를 외부에서 해결하려하다가 거꾸로 패착이 되어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아르헨티나는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민주화를 계속 추진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도 포클랜드(말비나스)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계속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해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대처 수상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결국 대처 수상은 이 분쟁의 해결을 바탕으로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데 성공하였고, "철의여인"의 개혁정책은 계속 탄력을 받아 추진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전쟁 당시 집권세력에게는 판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편집] 아르헨티나군과 영국군의 전력 비교
[편집] 참고할만한 사이트
-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의 기원
- http://www.geocities.com/datafuser/falklands.html[1]
- 한국국방연구원 세계분쟁 데이타베이스 중 관련 부분
- 불타는하늘 : 이 사이트는 공중전 관련하여 잘 알려진 한글 사이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