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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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영어 이름: 아놀드 쉔버그 Arnold Schoenberg, 1874년 9월 13일 - 1951년 7월 13일)는 서양고전음악 작곡가이다. 음렬을 사용한 12음기법과 무조음악을 정립한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쇤베르크는 빈에서 태어나서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레슨을 알렉산더 젬린스키에게만 받았다.) 20대에 오페레타의 관현악 편곡으로 돈을 벌면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1899)과 같은 작품을 썼다. 후에 그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작품 《구레의 노래》를 접했을 때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두고 자신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며, 말러를 "성자"로 여겼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에 《실내 교향곡 제 1번》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적었으며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1913년에 그 곡이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곡과 함께 다시 연주되었을 때 청중은 소리지르며 비난했다. 후에 베르크의 가곡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난동이 시작되어서 경찰을 불러야 할 정도였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조성음악을 부수는 것이었으므로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추종자와 학생들은 그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보았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싫어했다.
후에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음렬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다. 그들 중에는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와 한스 아이슬러가 있다. 그는 음악이론으로도 명성을 쌓았든데, 그의 책으로는 《화성 이론(Harmonielehre)》부터 《음악 작곡의 기초(Fundamentals of Music Composition)》까지 있다. 그의 책은 아직 출판되어 음악가들과 작곡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쓰이고 있다.
1933년 쇤베르크는 나치에 의해 유럽에서 추방되어 1941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죽었다.
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쇤베르크 자신이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는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고 두 달 후에 죽었다.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1914년)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
그 해에는 추상 미술과 정신 분석 요법이 등장하였다. 그당시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의 흐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로 들어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1년(Gurrelieder)부터 1910년(Five Pieces for Orchestra)까지 쇤베르크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더 급격히 바뀌었다.
그가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7과 실내 교향곡 작품번호 9를 완성했을 때 그는 그의 작풍을 왕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번째 사중주 작품번호 10과 세 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번호 11을 작곡했을 때, 화성에 첨가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실제로 연주되었을 때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쇤베르크 자신이 음악을 반복하거나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당시의 음악은 함축적이고 생략적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큰 고비가 되었다. 군에 복무하면서 곡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시기에는 그의 미완성 작품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음악의 질감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2음 기법을 만들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그의 친구 Josef Rufer와 산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 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을 빗대어 표현한 쇤베르크만의 조소적인 유머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모차르트와 바흐처럼 되고 싶어하는 야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쇤베르크는 많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서 그의 기법이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정점은 《모세와 아론》인데, 그는 삼분의 이 가량을 썼지만 완성하지 않았다. 결국 오페라는 모세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소리치는 부분인데, 쇤베르크가 그 자신을 어떤 예언자로 생각하여 더이상 작품을 쓸 수 없지 않았겠냐는 설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쓰여진 작품에서 그는 (전통화성은 쓰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화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음악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쇤베르크의 기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음악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 음악에 깊게 공감하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이 전시되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극과 시, 그리고 정치 문제와 유대인들에 대한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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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874년 태어남 | 1951년 죽음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 20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 오페라 작곡가 | 유대계 오스트리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