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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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8월 20일 - 1966년 2월 3일)는 순종의 두번째 황후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朴泳孝), 이재각(李載覺)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민씨(閔氏)가 사망하자 1906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 때, 부친 윤택영과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 남편의 즉위로 황후에 올랐으며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매국노들이 순종에게 병합 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으나 결국 백부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조선의 국권은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남편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전란에도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궐에 북한군이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자 크게 호통 쳐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듬해, 미군에 의해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휴전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방해로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1960년, 전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德惠翁主) 및 의민태자(懿愍太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평생의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하였다.
눈 감는 그날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령에도 영어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고 국문학과 불경(佛經) 연구에 혼신을 쏟는 등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966년 2월 3일, 심장마비로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