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민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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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태자(懿愍太子,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 및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이복 형제이다.
[편집] 생애
1897년 10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태어나 1900년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 1907년, 황태자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감시를 받았으며 학습원을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0년, 국권 강탈로 형인 순종 황제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됨에 따라 그도 이왕세자(李王世子)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마사코(方子) 공주(이방자)와 혼인하여 이듬해 장남 진(晉)을 얻었으나 1922년, 고국을 방문했다가 아들을 잃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함에 따라 이왕을 계승, 일본에 머물며 군무를 계속하였다. 1927년 5월,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길에 올라 홍콩, 싱가포르 등을 거쳐 7월, 프랑스에 도착, 영국의 조지 5세 국왕,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등을 차례로 예방하였다.
1931년 차남 구(玖)를 얻었다. 1935년, 일본 육군 보병 대좌가 되어 우츠노미야 보병 제 59연대 연대장을 맡았으며 육군 사관학교 교관 및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수부장을 거쳐 1938년, 육군 소장에,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어, 종전까지 일본 제 1 항공군 사령관 및 군사참의관을 맡았다.
1946년, 왕공족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이왕의 자격을 잃고 이승만의 방해로 조국으로의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한국인으로서 그대로 일본에 머물렀으며 이 때, 곤궁한 생활을 전전하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1961년, 아들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방문했다 귀가하던 중 뇌일혈이 재발, 박정희의 도움으로 1963년, 혼수 상태인 채로 56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였으며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묻혔으며 의민태자에 추존되었다.
종묘 영년전 제16실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시호는 문인무장지효명휘(文仁武莊至孝明暉)이다.
[편집] 가족 관계
1907년 민갑완이 세자비로 간택되었으며, 이후 신물(信物)까지 보내왔으나 둘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민갑완은 평생 수절을 지켰다. 의민태자는 1920년 4월 28일 도쿄에서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명:이방자)와 혼인을 하였다.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석녀(石女)와 혼인케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의민태자와 이방자는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으나, 8개월 만인 1922년 5월 사망했다. 1931년 12월에 어렵사리 얻은 둘째 구(玖)는 후에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혼인하였으나,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고종의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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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친왕 | 순종 | 의친왕 | 의민태자 | 이문용 | 덕혜옹주 |
전 임 순종 |
제28대 대한제국 황실 수장 1926년 4월 24일 - 1970년 5월 1일 |
후 임 이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