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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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Ankara, 옛 이름 앙고라, Angora; 고전 시대에는 안키라, Ancyra, 북조선 표기: 앙까라)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358만 2000명이다(2003년 통계).
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 수도가 되기 전 앙카라는 앙고라 염소와 그 질고 긴 털로 만든 앙고라 모피로 유명했다.
아나톨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무역과 터키의 도로·철도망의 교차로이다.
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Hacettepe Üniversitesi)와 앙카라대학(Ankara Üniversitesi)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Ulus)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Yenisehir)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로 대표되는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
[편집] 역사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라틴어 Tectosages)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192년 처음 기록이 남아있는 안키라 교회를 바울이 세웠다는 증거는 없고 그가 갈라티아 북부에 다녀갔다는 증거도 없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王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튀르크족의 지도자인 정복자 티무르 대제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했으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에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