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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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는 친위대(Schutzstaffel) 소속 무장 전투집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육/해/공군에 이은 제4의 군대로 활약했다. 총사령관은 SS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였으나, 전쟁 기간 중 전투 지휘는 국방군(Wehrmacht) 최고사령부(OKW)의 지휘를 받았다.
비록 첫 출발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부를 경호하는 소박한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무장친위대는 90만명을 상회하는 병력으로 구성된 38개 전투 사단과 기타 엘리트 부대로 갖춘 군대로 성장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무장친위대는 잔혹 행위에 가담한 것때문에 범죄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무장친위대의 베테랑들은 다른 독일군 참전 군인들과 달리 군인으로서 많은 권리를 거부당했다. 그러나 다수의 징집병들은 독일 정부에 의해 무장친위대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범죄자 낙인에서는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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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창설 배경
무장친위대의 기원은 히틀러의 경호원으로 활동했던 200여명의 선택된 그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들 "경호원"들은 히틀러가 SA((독일어: Sturmabteilung, 영어: Storm Troopers)에 대한 통제가 쉽지 않자 만들어낸 것이었다. 돌격대(SA)는 너무 규모가 커져서 히틀러는 그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무장 경호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때문에 친위대(SS)가 창설된 것이다. 1923년 뮌헨 봉기의 실패로 투옥 생활(그리고 석방되고 나서) 후에 히틀러는 경호대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SS의 지위는 나치 계층 내에서 공고해졌다.
1929년까지 여전히 SA가 나치당의 주요 물리력이었으나, SS도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1929년 1월, 히틀러는 하인리히 히믈러(이때 그의 계급은 SS제국지도자가 되었다)를 맡겼고, 히믈러의 목표는 당 내에서 엘리트 군단으로 SS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SS는 여전히 매우 작은 조직이었다. 그가 SS의 지휘권을 인수했을때 총 대원수는 고작 290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1933년 즈음에는 효율적인 군대가 되기를 원했다. 히믈러는 지적 능력과 정치적 신념을 두루 갖춘 독일 사회의 엘리트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SS로 임명했다(대개는 명예직이었다). 여기서 정치적 신념은 나치즘에 대한 동조 여부이며, 지적 능력은 인종주의에 대한 것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믈러는 SS를 1933년 말에 겨우 5만 2천여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
SS가 서서히 팽창하고 있던 같은 시기에 정권 장악 후 급격히 늘어난 SA의 총 대원수는 1933년 말에는 200만명, 1934년에 전국적으로 400만명을 헤아렸다[1]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던 에른스트 룀이 지도하던 돌격대는 독일 국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던 히틀러의 시도에 위협이 되었다. 또한, 히틀러가 독일 정부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히는데 필요한 지원을 해주던 독일 보수파와 히틀러와 관계에도 위협이 되었다.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해서 혁명은 끝났다고 경겨망동을 삼가하라는 경고를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룀과 SA는 제2혁명을 주장했고, 사석에서 룀은 히틀러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말도 내뱉는 상황이 되었다. 히틀러와 돌격대 사이에 위기감이 고조될때, 히틀러는 SA의 행동에 대응하기로 결심했고, SS에 룀과 SA 고위 간부들을 제거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이 1934년 6월 30일 발생한 룀 숙청 사건(흔히 "긴 장검의 밤"이라고 불린다)이다. 룀과 기타 SA 고위 간부들 뿐만 아니라 반나치 또는 나치당이면서도 히틀러에 반대한 인사들이 이때 같이 숙청되었다. 그레고르 슈트라사나 쿠르트 폰 슐라이허 같은 인물들은 SA와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때 암살당한 사람들이다.
[편집] 초기 역사 : LSSAH, SS-VT,SS-TV
무장친위대의 기간 인원은 다양한 우익계 준군사 조직을 거친 자유군단과 제국 육군 출신자들이 채웠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령으로 편성 SS 아돌프히틀러 친위연대가 무장친위대로 발전하게 될 첫번째 조직이었다. 룀 숙청 사건으로 SA가 힘을 잃을때 많은 SA대원들이 SS로 전속을 요청했고, 그들을 흡수하여 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발전하는 SS전투부대(SS-Verfugungstruppe, SS-VT)와 나치 강제 수용소 경비대인 SS토텐코프페어반데(SSTV)(훗날,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가 됨)를 포함한 새로운 몇 개의 부대를 창설했다.
무장친위대(WaffenSS) 대원 대다수는 구 체코제와 오스트리아제 무기와 장비를 지급받아 2선급 무기와 장비로 무장했다. 소수의 선택받은 독일계 SS사단들을 제외하면, 이 정책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독일 국방군이 무장친위대의 병기 문제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다는 점도 한 몫했다. 최고 성능의 장비 대부분은 독일 육군의 엘리트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교도기갑사단으로 보내졌다.
1급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동부 전선에 투입되면서 표준 장비를 지급받기 시작했고, 기갑척탄병 또는 기갑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나머지 SS 사단들은 2선급 장비로 무장했다.
[편집] 훈련
[편집] 고난의 시기
[편집] 잡다한 질(質)과 상상속의 질(質)
[편집] 외국인 의용병 및 징집병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계속 시도해온 히믈러는 SS의 통제를 받는 외인부대 창설을 결심했다. 중세적 전승에 대한 기호로, 이 제국지도자는 "무신론자 볼세비키들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구한다는 명분의 십자군을 계획하였다.
종전 시점에서 무장친위대 병력의 약 60%는 독일인이 아니었다.[2].
무장친위대에 존재한 가장 쓸모없는 부대가 영국 자유군단이었다. 존 애머리가 "군단장"이었던 이 "군단"은 영국 및 영연방국가 시민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30명 이상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미국 자유군단 또는 "조지 워싱턴 여단" 역시 병력 수가 5명 이상이 된 적이 없던 순전히 선전용 목적으로만 존재했다.
[편집] 전쟁 범죄와 잔학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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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번역중 | 나치 친위대 |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군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