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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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원래 이름: 훈민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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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종류 | 음소 문자 중 자질 문자 | |
표기 언어 | 한국어 | |
사용 시기 | 1443년~현재 | |
한글의 구조 |
한글은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1443년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였다. 이후 많은 사대부의 반대를 겪고, 상말, 언문, 암클 등으로 불리우며 천대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근대 한글학자인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갈래는 표음 문자(소리글자) 가운데 음소 문자에 속한다.
목차 |
[편집] 이름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지은 것으로 '크다', '바르다', '하나'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 글 가운데 바른 글(똑 바른 가운데를 '한'가운데라 하듯이), 모난 데 없이 둥근 글(입 크기에 알맞게 찬 것을 한 입이라 하듯이)이란 여러 뜻을 한 데 모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줄여서 '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막연히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로 불리거나 혹은 '암클'(여성들이 배우는 글) '아햇글'(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불리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국서(國書), 국문(國文)이라고 불렀고 혹은 '조선글'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의 글이라는 보통 이름일 뿐이며, 고유 명사로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전에는 '가갸글'이라 불렀다.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관해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국어 연구 학회'를 '한글모'로 바꾼 바 있고, 같은 해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에서 발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고 1914년 4월에 '조선어 강습원'이 '한글 배곧'으로 이름을 바꾼 것 등으로 볼 때 1913년 무렵 주시경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한다.
현재 한글의 명칭은 대한민국에서는 '한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글'로 부르고 있는데, 2001년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ICCKL 2001)"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 학자들이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등록하기 위한 명칭으로 '정음(Jeongeum)'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지만, 중국 같은 경우 '한글'과 '조선글' 밖의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한글은 물론 한국어를 '한구루(ハングル)'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남측의 '한국어'와 북측의 '조선어' 사이에서 나온 일종의 절충안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본디 문자의 이름이지만, 관용적으로는 '한국어를 한글로 적은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책이나 소프트웨어 등의 한글 번역본을 '한글판'이라고 부르고, '한글을 배운다'는 표현은 '한국어를 한글로 쓰는 것을 배운다'를 뜻한다.
[편집] 얼개
한글은 낱소리 문자에 속하며, 낱자 하나는 낱소리 하나를 나타낸다. 낱소리는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로 이루어진다.
한 소리마디는 첫소리(초성), 가운뎃소리(중성), 끝소리(종성)의 낱소리 세 벌로 이루어지는데, 첫소리와 끝소리에는 닿소리를 쓰고 가운뎃소리에는 홀소리를 쓴다. 한글은 낱자를 하나씩 풀어 쓰지 않고 한 소리마디로 모아 쓰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편집] 낱자
처음 한글 낱자는 28가지였으나, 그 가운데 닿소리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시옷)과 홀소리 ㆍ(아래아)가 사라져 현대 한글은 모두 24자로서 닿소리 14자와 홀소리 10자로 되었다. 낱자의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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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물네 가지를 바탕으로 하는데 모두 홑소리(단음)이고, 홑소리로 나타낼 수 없는 겹소리(복음)는 두세 홑소리를 어울러서 적되, 그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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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글에서는 끝소리가 없으면 받침을 쓰지 않고 끝소리가 있을 때에만 홑받침 또는 겹받침을 쓰는데, 홑받침에는 모든 닿소리가 쓰이며, 겹받침에는 홑홀소리 아래에만 놓이는 겹닿소리 ㄲ(쌍기역)과 ㅆ(쌍시옷)과 따로 이름이 없지만 모든 홀소리 아래에 놓일 수 있는 겹받침으로만 쓰이는 겹닿소리가 있다. 모든 받침의 소릿값은 끝소리 규칙에 따라 7갈래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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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올릴 때에는 첫소리 > 가운뎃소리 > 끝소리의 순으로 정렬하되, 그 정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소리 |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
가운뎃소리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
끝소리 | ( ) ㄱ ㄲ ㄳ ㄴ ㄵ ㄶ ㄷ ㄹ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ㅁ ㅂ ㅄ ㅅ ㅆ ㅇ ㅈ ㅊ ㅋ ㅌ ㅍ ㅎ |
[편집] 모아쓰기
한글의 모든 낱자는 한데 모아 쓰도록 하고 있으며, 닿소리를 가장 먼저 쓰고 그 오른쪽이나 아래에 홀소리를 적으며, 모든 받침은 닿소리와 홀소리 밑에 놓인다. 따라서, 소리마디로 모아쓸 때는 다음과 같은 틀에 맞추어 쓴다.
- 중성이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ㅣ일 때는 중성을 오른쪽에 붙여 쓰고, 종성이 있을 경우 그 아래 붙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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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성이 ㅗ, ㅛ, ㅜ, ㅠ, ㅡ일 때는 중성을 아래쪽에 붙여 쓴다. 종성이 있으면 그 아래 붙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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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성이 ㅘ, ㅙ, ㅚ, ㅝ, ㅞ, ㅟ, ㅢ와 같이 아래쪽에 붙이는 모음과 오른쪽에 붙이는 모음의 복합일 때는 다음과 같이 아래쪽에 먼저, 그 다음 오른쪽에 붙여 쓴다. 종성은 마찬가지로 아래쪽에 붙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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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소리마디 개수
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1] 소리마디를 적을 수 있지만, 현행 한글 맞춤법에서는 그 가운데 8,873[2]개를 쓰고 있으며 사용 빈도는 상위 2,350[3]자가 99.9%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현대 한국어에서 실제 소리나는 소리마디는 3,192[4]가지이다.
- ↑ 닿소리 19 × 홀소리 21 × (받침 27 + 받침이 없는 경우 1) = 11172
- ↑ 현행 맞춤법에서 겹홀소리 아래의 겹받침은 ㄲ, ㅆ 2개만 사용되므로 2,299자가 빠진다.
- ↑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글자이다.
- ↑ 현대 한국어는 7종성법에 따라 모든 끝소리는 7갈래로 모이고 여기에 끝소리가 없는 것까지 넣으면 모두 8갈래가 되므로, 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8 = 3192
[편집] 역사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이다. 창제 당시에 한글은 '훈민정음'이라 불렸으며 1446년 음력 9월 초에는 《훈민정음》이 책으로 엮어졌다. 이 두 사실은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의 머릿글에 나오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종대왕이 홀로 글을 창제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글을 창제했는지가 문제이다. 세종실록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친제(친히 만듦)'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성현(1439년~1504년)의 《용재총화》 제7권에서 세종이 언문청을 세워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글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에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관여했다는 설이 우세하게 되었으나 이기문(〈훈민정음 친제론〉, 《한국문화》 13, 1992)을 비롯한 학자들은 기록에 나타난 당시 정황을 볼 때 세종이 한글을 홀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창제 후 세종은 표음주의 표기를 주장하는 신하들에 맞서 홀로 형태주의 표기를 주장하고 중국 음운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는 등 해박한 언어학 지식을 보여주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후 정음청에서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후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후 5년 뒤에 《동국정운》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것의 발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목적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훈민정음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낱자 28글자와 소리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글자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ㆍ, ㅿ, ㆆ, ㆁ' 네 글자와 높낮이 글자가 사라져서 24글자가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몇 곳에서는 아직도 ㆍ의 발음이 남아 있다.)
그 뒤로 몇백 년에 걸쳐, 한문을 떠받들던 양반층은 한글을 언문이니 암클이니 아해글이니 업신여기면서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백성과 여자들은 서로 주고 받는 편지나 계약서 등에 한글을 썼고, 궁궐에서 여자끼리 주고 받는 문서에 한글을 쓰기도 하였다.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의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 5월 8일의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에서 법률 및 명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고, 1905년 지석영이 상소한 여섯 항의 〈신정국문〉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지만,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 5월에 이능화가 〈국문일정의견〉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의 청의에 따라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었는데, 국문연구소의 연구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 및 어윤적, 이종일, 이억, 윤돈구, 송기용, 유필근, 지석영, 이민응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의 《대한문전》, 1909년 유길준의 《대한문전》, 김희상의 《초등국어어전》, 1910년 주시경의 《국어 문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 1913년 남궁 억의 〈조선문법〉, 이규영의 〈말듬〉, 1925년 이상춘의 《조선어문법》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 말본》으로 집대성된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와 같은 모임에서 꾸준히 애쓴 덕에 조금씩 우리 겨레 글자로 힘을 얻게 되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 선생이 지은 것이며 조선어학회가 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다음에는 남북한 모두 공문서와 법전에 한글을 쓰게 되었고, 끝내 한국어를 받아 적는 큰 글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현재 북조선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글'이라 한다.
한편, 한글이 가림토라는 옛 글자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바탕은 없다.(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보라.)
[편집] 같이 읽기
- 옛한글
- 한글 낱자
- 한글 낱자 목록
- 현대 한글에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글자들의 목록
- 한글과 비슷한 문자
- 국어 순화
- 한글 우월주의
-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편집] 외부 링크
분류: 정리가 필요한 문서 | 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