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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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李方子,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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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츠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나가코 황후가 됨) 및 화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록폰기의 이왕저에서 이은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일본의 불순한 의도로 이루어진 정략 결혼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화목했고 불임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2년,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이 자신과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두고 급서하는 슬픔을 겪었으며 1923년, 관동대학살로 무고한 조선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충격과 자책의 나날을 보냈다.
1931년, 둘째 구(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이후,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복지 사업을 시작,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1966년, 심신장애자들의 재활을 위한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농아 및 소아마비자들의 사회 적응을 위한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서울칠보연구소를 운영하며 칠보(七寶) 만들기로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정신박약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 광명 명혜학교(明惠學校)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남편의 뜻을 받들어 복지 사업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추앙되었다. 일본에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서 지내는 아들 구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유명 인사 등 1000여명이 참례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 영원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2006년 11월, 일본 후지TV에서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2006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김희애를 주연으로 이방자의 일대기를 그릴 드라마가 기획 중이다.
[편집] 자녀
- 장남 이진(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두고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 차남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부인은 미국 태생의 줄리아 멀록. 부친의 죽음 이후 황실의 수장을 맡아 한국에 거주하다가 아내와 별거했으며, 사업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이혼하였다. 일본에서 지내던 중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난 자리이기도 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저서
- 《지나온 세월》
- 《The World is One》
- 《세월이여 왕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