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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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순(鮮于순, 1891년 ~ 1932년)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이름의 '순'자는 쇠금변(金)에 순(筍)자를 더한 글자이다.
그의 동생인 선우갑 또한 거물 친일파 밀정으로 유명하다.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은식, 이동휘의 서북학회 기관지에 1909년 기고한 기록으로 보아 초년 시절에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 분명치 않다.
그는 1910년 일본어 신문인 평양신문 주필을 지냈고, 그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에는 일본의 도지샤 대학을 나왔다. 도지샤 대학에서는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 이 과정 또한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 기독교 조합교회에서 설립한 평양기성교회 신자로서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 유학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지샤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한 선우순은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 조합교회의 배역유세단 강연회가 전국에서 이어졌는데, 이때 선우순은 적극 참가하여 3·1 운동 후속 시위들을 진정시키고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주지시키는 일에 뛰어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민심의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총독부의 수습책을 건의하는 밀정 활동도 병행했다.
1920년 좀더 조직적인 선전 작업을 위해 평안도 지방의 친일 인물들을 규합한 대동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선우순은 대동동지회 소속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처럼 일본과 융화하여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동동지회는 기관지 《대동신보》와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여 이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이용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의 맹렬한 활약으로 민원식, 유일선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친일 인물로 급부상했고, 이같은 공을 인정 받아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인 면회 횟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선우순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면담 횟수 1위(46회, 2위는 송병준의 33회), 1922년부터 1923년까지 2위(34회, 1위는 민흥식의 36회),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또다시 1위(39회, 2위는 이진호의 37회)로, 이 기간 중 사이토가 가장 가까이 한 인물이었다 [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우갑과 함께 선정되었다.
[편집] 각주
- ↑ 김민철, 〈총독관저를 드나든 조선인들〉, 《우린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한국역사연구회, 1998) 중에서
분류: 1891년 태어남 | 1932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