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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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西人)은 조선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사림파 가운데 훈구파를 강하게 비판했던 동인(東人)과는 달리 온건파의 입장을 취했던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점이 없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서인을 자처하게 된 이이와 성혼을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의 기호지역 명문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였고, 시기적으로는 명종 때 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일찍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오래 활동한 선배 사림파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든든한 배경은 서인이 조선 후기 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573년경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서인은 선조대에는 동인의 적극적 입장에 밀려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선조 21년 서인인 정여립의 모반을 반격의 기회로 삼아 정철을 중심으로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임진왜란 초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실각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등극과 함께 북인(北人)에게 완전히 밀려 위축되었다.
그러나 남인(南人)과 손잡고 계획한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재집권한 서인은 숙종대까지 남인과 공존하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그 제자 윤겸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분기되어 그 통일적 색채를 잃었다.
학문적으로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설에 주로 기대면서도 동인 계통의 학문적 본원인 이황의 업적을 인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십만양병설 등을 주장한 이이의 실용적 기풍을 계승하여 보다 현실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광해군대 이후로는 보수적인 색채로 돌아서 주자학의 명분론과 예론을 철저히 수호하는 입장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