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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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朴堤上, 363년 ~ 419년경)은 신라의 정치가이며, 충신이다.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도원(挑園)·석당(石堂) 등이다.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박제상의 이름을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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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행적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왜국(倭國)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자신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 《일본서기》, 《동국통감》, 《문헌비고》 등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각 기록의 내용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편집] 기록
[편집] 《삼국유사》의 기록
박제상 활동 당시의 정세와 그의 행적에 대해서,〈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 모두를 할애하여 길게 다루고 있다.
[편집] 《징심록 추기》의 기록
《징심록 추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징심록 추기》는 김시습이 저술했다고 추정되나, 위작 여부 및 신뢰성 여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 제상공이 어렸을 때, 한 도인이 공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견우성(牽牛星)의 화신이니 반드시 제도(濟渡)하는 공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제상'이라고 하였다. 자라자 도인이 또 알리기를, "동촌 김공의 집에 17살 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공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하였다. 그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사람은 별의 정기로 이루어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그러므로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1]
[편집] 망부석 설화
망부석(望夫石) 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박제상의 부인에 얽힌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의 중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 王旣見寶海, 益思美海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 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 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 왕이 이미 보해(복호)를 만나자, 미해(미사흔)의 생각이 더하여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니, 눈물을 흘리며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마치 한 몸에 팔이 하나인 듯, 한 얼굴에 눈이 하나인 듯,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었으니, 어찌 감히 괴롭지 아니한 일인가." 그 때에 제상이 그 말을 들으니, 다시 절하고 하직하여 말을 탔다.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바로 율포(栗浦) 물가로 향하니, 그의 처가 이를 듣고, 말달려 율포로 좇아가니, 이미 지아비가 배 위에 올라있었다. 아내가 간절하게 부르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며 떠났다.
같은 편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 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 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이를 듣고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누워서는 크게 부르짖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의 이름을, 장사(長沙)라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척이 부축하며 돌아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르게 되었다. 오랜 후에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생을 마쳤다. 그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존재한다.
치술령은 울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에 있는 바위는 지아비를 그리워하던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이라고 부른다. 문헌의 마지막에서 언급된 사당은 인근에 위치한 은을암(隱乙岩)으로, 죽은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망부석과 은을암은 함께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편집] 저서
《부도지》는 눌지 마립간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러 삼도(三島)로 건너가기 전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편집] 각주
- ↑ 《부도지》, 박제상 저, 김은수 번역·주해 , 한문화, 2002년
분류: 정리가 필요한 문서 | 363년 태어남 | 신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