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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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대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쿠데타로 종신 집정이 된 후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편집] 생애
1769년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은 집안 살림이 어려워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파리 군사학교( 에 입학하였다. 1785년 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 그는 프랑스 혁명 때는 혁명가 대표인 로베스피에르 편에 가담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사형 당하자 나폴레옹도 감옥에 갇혔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 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3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풀려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외쳤다. 산맥을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여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 와n이탈리아 의 북부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디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 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때 로제타석의 언어를 해석한 학자는 천재 언어학 언어학자 샹폴리옹 이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동생 루시앙의 도움으로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1802년 8월 2일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종신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1802년에는 숙적인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그의 여론몰이는 적중하여 2년 뒤인 1804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여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나선 지 겨우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대관식은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하객들의 기가 질릴 만큼 호사스럽게 거행되어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고 선전하는 정치적 행사로 연출하였다.
나폴레옹은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치고 유럽 의 맹주로 떠올랐다. 기득권층인 귀족들에게 억눌림을 받던 유럽의 부르주아들과 민중들은 자기 나라를 침공하는 프랑스군을 혁명군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프랑스군은 점령국에서 갖은 횡포를 부려 원성이 잦아들게 되었다. 1806년 에스파냐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형을 왕위에 앉히고, 프랑스에 반대하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그러자 점령국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게릴라 투쟁은 프랑스를 계속 괴롭혀 대서, 나폴레옹 자신도 에스파냐의 게릴라들을 위궤양에 빗댈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형상 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거기에다가 1813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까지 겹쳐 이러한 연속적인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였고 결국 1814년 지중해의 작음 섬인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에스파냐,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1814에 혼란을 틈타 다시 황제로 복귀하였지만(백일천하,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세인트헬레나 ]으로 다시 유배되어 1821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유해는 파리 시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편집] 유산
나폴레옹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 대륙 전체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전파한 것이다. 그와 함께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각국의 법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798년의 이집트 원정 중에 발견된 로제타석은 근대 이집트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건설을 명령한 개선문은 에펠탑과 더불어 파리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로 남아있다.
나폴레옹의 조카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의 후광에 힘입어 프랑스 대통령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