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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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羅唐戰爭)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군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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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전쟁의 직접 원인은 당나라가 신라와 약속을 어기고, 신라마저 당나라로 편입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나·당 연합군이 승리하면 대동강 이남의 전 지역을 신라가 소유한다는 약정을 맺은 바 있었다. 그러나 당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라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면서 나·당의 대립은 차츰 심각해져 갔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신라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미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663년([[신라 문무왕|문무왕 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당이 신라를 자국의 한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신라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아직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었던 관계로 당나라와 직접 마찰은 빚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의 당에 대한 적개심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로 하여금 신라까지 삼국을 관리하도록 하여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결국 폭발했다. 이제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편집] 전쟁의 시작
[편집] 고구려 부흥군
고구려 멸망후, 옛 고구려 유민들은 백제 유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신라는 건국때부터 중국 세력과 싸워온 고구려 유민들을 앞세워 당과 전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金馬渚: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주는 일이었다. 안승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은 결집하기 시작했고, 이들 유민들로 편성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과 나란히 대당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신라의 9서당 군제에서도 이들 유민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편집] 신라의 선제 공격
전쟁은 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유민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신라군은 옛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 주둔군과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 백제의 왕족 출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는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편집] 당의 반격
이에 당나라는 671년, 설인귀에게 수군을 지휘하여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 쪽에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압록강으로 도하시켰다. 육군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 수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돌아갔다.
분을 참지 못한 당 고종은 674년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또 백제의 옛 땅을 무력으로 강탈했다고 하여 하여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고, 수십만의 군대를 신라를 침공케 하였다. 이는 신라에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책략이었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실 백제의 땅은 648년 약정에 따라 신라의 영토여야 했으므로, 당 고종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
675년 9월, 671년에 수군을 이끌고 침공했다가 실패했던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유학생)이었던 풍훈(風訓)을 길라잡이로 삼아 다시 쳐들어왔으나, 천성에서 패하고 철수했다. 9월말에는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편집] 신라의 반격과 승리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당군과 신라군은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 18차례를 벌였다.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일대) 앞바다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수군과 신라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 수행의 의지를 상실했다.
[편집] 전쟁 결과
당나라는 676년 평양의 안동도호부을 요동성으로 옮기고, 웅진도독부는 건안성(建安城:지금의 개평)으로 옮기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대동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원산 이남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편집] 의의 및 평가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의 힘을 빌은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 영토적으로도 만주는 포기했던 것도 그런 비판의 한 이유였다. 그러나,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성립되었고, 나당전쟁을 통해 당나라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대동강 - 원산 이남 선이기는 하나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를 가진다.
[편집] 전쟁 후 양국
전쟁 후 두 나라는 한동안 소원한 관계였으나, 발해 문제로 다시 가까웠졌고, 적대 관계를 청산하면서 무역 및 문화교류를 재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