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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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중국어: 箕子 Jīzǐ)는 기원전 9세기경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알려진 현자이다. 성은 자(중국어: 子 Zi) 이고 이름은 서여(중국어: 胥餘 xūyú) 혹은 수유(중국어: 須臾 xūyú)였다. 기씨 성을 받았기 때문에 보통 기자라고 부른다.
[편집] 전설과 분석
시간이 흐를수록, 기자에 대한 전설은 점점 많아져서 많은 부분이 지어낸 것이라는 점이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 산둥 성에서 발견된 기자의 묘가 가지에 대한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1] 기자가 고조선으로 건너갔다면, 기자는 고조선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산둥 반도는 고조선의 영토가 아니다. 중국 전국 시대 죽서기년과 상서에는 은나라 주왕에게 간하다가 옥에 갇혔으나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면서 석방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2]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 전한 시대의 문서에서는 기자는 고결한 은나라의 왕족으로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은 주왕의 숙부이자 태사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는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인 정치가로 높이 칭송받았다고 한다.
한나라 혹은 그 이후의 기록에는 다른 내용이 추가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기자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조선으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다. 주나라의 무왕은 기자가 자신의 가신은 아니지만 조선의 왕으로 봉했으며 기자는 조선과 중국에 예절과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서 이 내용은 송미자세가편에는 나오지만, 조선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고, 위만조선은 기자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단지 "기자는 고결하고 덕과 학문이 뛰어나다."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한나라 혹은 그 이후에 "조선을 다스렸다."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에 한국사 영역에서는 기자 동래에 대해 긍정론(제왕운기에서 단군을 전조선의 시조, 기자를 후조선의 시조로 보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인식함), 부정론(위만이 쫓아낸 준왕의 성이 한씨였다는 점에 주목), 부분긍정론(기자족은 동이족의 하나의 씨족단위로써 단군조선과는 독립된 기자조선을 건국함)으로 나뉜다.
위나라 (220-265) 혹은 그 이후에는 기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추가되었다. 그것에 따르면 기자의 후손들은 주 나라 쇠퇴 이후 조선에 남아서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왕인 준왕은 기원전 192년에 조선으로 도망간 연나라 사람인 위만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반도의 중국 통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여서 중국에서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의 한서의 지리편에 기자가 요서 지방에 정착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일부는 이것을 믿고 일부는 믿지 않는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랴오닝 성에 있는 작은 도시가 기후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기후는 기자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편집] 참고 문헌
- ↑ ((중국어))infobase.gov.cn – 기자의 묘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 ↑ 파스칼 백과사전
분류: 정리가 필요한 문서 | 고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