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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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원년(즉위년 다음해)인 1675년에 북애자가 저술한 역사서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들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된 사료이다.
《규원사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대이며, 전체 내용은 1940년에 양주동이 소장하던 필사본으로 공개되었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 ~ 1946) 북애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필사본을 구입하였는데,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인증이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최근의 학계는 규원사화의 저작 연대는 인정하는 추세이나, 그 내용은 조선 후기에 전래되는 야승을 모은 것으로 간주, 사서로서의 인정을 보류하며, 조선 후기 도가사상의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북조선 학계는 《규원사화》의 일부 내용을 인정하여 《고조선력사개관》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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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저자
- 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말의 도인으로 추정되며, 선가의 말이 많은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선조 때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간단하게 언급되었다.
[편집] 구성
- 서문(序文)
- 조판기(肇判記)
- 태시기(太始紀)
- 단군기(檀君紀)
- 만설(漫說)
[편집] 내용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淸平 李茗)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대기》는 세조 때에 내려진, 잡학(천문, 지리, 역사)의 책을 구하는 유시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어서, 조선 초까지는 그 내력이 전해져 내려온 책이다.
단원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원사화서〉는 서문에 해당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다.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의 세 부분은 《조대기》에서 주로 인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판기〉는 수백만 년 간의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고 환인의 의지, 환웅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 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1만 1천 년 간의 치세의 내용을 설명한다.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나라를 세워 다스리고 이후의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나라를 다스리는 1천 2백여년 간의 치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만설〉은 후기에 해당되며, 북애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담고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내용 전부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에는 북애자의 의견이 없는 듯하다. 〈태시기〉와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나 주체를 명확히 표시하고 있어서 추가된 부분의 구별이 가능하다.
규원사화에는 단군조선 1천 년 간의 내용이 중국의 삼대(三代; 하.은.주의 세 나라)에 해당되는 만주와 요동, 한반도를 아우르는 이상사회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 역사와 비교하면,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조판기〉는 반고 신화로 대표되는 중국의 창세 신화와 구별되며, 〈태시기〉에 등장하는 삼황오제는 치우씨와 황제씨(黃帝氏)의 전투에서 치우씨를 천왕(天王)으로서 승자로 기록하고 있는 등 중국 측의 기록과 유사한 듯 하지만 그 입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편집] 진위논란
《규원사화》의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규원사화》 위서론에 반박하고 그 내용의 실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임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은 당시의 전해지는 야승을 모아 재구성된 것어서 실사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아직은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 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1975
-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1981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
- 심백섭,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3
이상과 같이,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에서의 《규원사화》는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긴다.
북조선의 경우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른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000여 년 간 47대왕이 통치했다는 기록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그 내용을 채택하였다.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편집] 위서론 및 반론의 주장
다음은 현재까지 제시되어 있는 규원사화의 위서론 및 반론이다.
- 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 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
- 문맥상 '文化'는 당시에 쓰이던 '문치교화'를 어긋나지 않으며, 壬辰之役, 先民, 民氣의 단어들도 그 이전 시대의 서적에서 확인된다.
- 후대에 출간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틀린 내용이다. 《규원사화》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해동역사》는 《규원사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 두 책의 저자 모두 《고려사》를 잘못 인용한 다른 책을 보고 그대로 옮겨 적었을 수 있다.
- 후대의 책이 선대의 책을 옮겨적은 것이 당연하다. 주장의 근거가 부족하다.
- 저자는 〈만설〉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으나, 숙종 원년은 전란 후 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 문맥을 고려하면 문제 없는 내용 전개이다. 빼앗긴 강토는 발해의 영토인 만주와 요동을 의미한다.
- 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틀리다.
- 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 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책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 산속에 숨겨둔 도교 계열의 책이어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없다.
-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 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이후 2백여년 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자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북애자의 생각을 적은 만설에 적혀 있는 첨성대의 건립 시기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