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식스토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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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토 5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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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식스토 5세(라틴어: Sixtus PP. V, 이탈리아어: Papa Sisto V)는 제227대 로마 교황(재위: 1585년 4월 24일 - 1590년 8월 27일)이다. 속명은 펠리체 페레티(이탈리아어: Felice Peretti)이다.
[편집] 생애
1520년 12월 13일 이탈리아 안토나의 마르케의 몬탈토 근처 그로탐마레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하여 1547년에 신부가 된 후 페르모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설교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종교 재판에 관여하였다. 1570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레고리오 13세가 선종하자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일치되지 않았다. 펠리체는 후보자들 중 중립적인 인물이어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식스토 5세로 명명하였다.
식스토 5세는 교회 쇄신을 목표로 성직자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이 전 교회에 두루 미치게 하였다. 1585년 12월 20일 칙서를 발표하여 모든 주교들이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구의 업무를 보고하게 하였다.(Ad Limina) 식스토 5세는 추기경의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고 그들에 관한 규정을 정하였다.(Postaquam Verus) 이 규정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1588년에는 교황청에 15개의 성(congregatio)을 두어 추기경이 장관이 되어 교황청의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Immensa Aeterni Deus) 이는 현대 교황청 구조의 전신이 되었다.
식스토 5세는 프란체스코회를 편애하여 그 수도회 출신인 사람들을 대거 공직에 임명하였다. 은총에 관하여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에서 제기된 논쟁에 대해서는 쌍방이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식스토 5세는 선교에도 많은 열성을 보여 청나라, 일본, 필리핀, 아메리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식스토 5세는 교황령 안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시켰다. 또한 예술과 학문을 숭상하여 라테란 궁전을 비롯하여 퀴리날레 궁정을 증축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두오모를 완성시켰으며 로마 대학교를 많이 지원하였다.
식스토 5세는 프랑스에 개신교가 확산되지 않도록 프랑스와 제휴하고 유럽의 정치적인 균형을 원하여 에스파냐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였다.
전 임 그레고리오 13세 |
제227대 교황 1585년 4월 24일 - 1590년 8월 27일 |
후 임 우르바노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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