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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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는 고전시대에 그리스어가 통용되었던 사회를 일러 부르는 용어이다. 이는 현대 그리스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헬라스 문화를 퍼트린 지역을 포함한다: 키프로스, 당시 이오니아로 알려진 터키의 에게해 연안, 마그나 그라이키아(시칠리아와 이탈리아남부)와 현재의 알바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리비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남부, 카탈루냐, 사카르트벨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의 그리스 정착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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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에게 문명
[편집] 발견
19세기 중엽까지만도 전설상에 묻혀있던 에게 해 문명은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1870년 소아시아의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해 9개의 성채와 도시가 발견되며 역사시대로 편입되게 되었다. 이에 화룡점정(畵龍点睛)격으로 1900년부터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는 크레타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labyrinth)'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발굴에서 선형문자(線上文字)가 기록된 점토판문서(土版文書)를 많이 발견하였다. 1952년 벤트리스는 선형 B문자(Linear)의 해독에 성공하여 미케네 문명에 관한 연구가 획기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에게 문명은 미노아 문명과 그리스와 트로이를 포함한 미케네 문명으로 크게 구분된다.
[편집] 미노아 문명
크레타를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아 문명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기원전 3000년기 중엽에 청동기시대로 들어섰으며, 기원전 2000년을 지나서는 선형 A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문명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했다기보다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 접어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기원전 1570년과 기원전 1500년에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는데 그 원인은 지진이라고도 하고 이 무렵 이집트에서 추방된 힉소스의 침입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원전 1450년에는 선형 A문자 대신 선형 B문자가 나타나는데, 이는 이 무렵 미케네인의 크레타 지배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크노소스의 문명은 기원전 1400년 크노소스 궁전이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으면서 멸망했다. 1960년대의 새로운 발굴에 의해 테라섬의 화산폭발로 인한 화재와 대해일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노아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했고 도자기 제조술이 뛰어났다. 미노아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달하고 유복하고 상류층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미노아의 예술은 화려하고 생생하며, 인간성과 개성에 충만해 있다. 바다와 태양, 수목과 꽃, 축제와 스포츠에 도취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미노아 예술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미노아 예술의 대표적인 것은 궁전의 프레스코화이다.
[편집] 미케네 문명
미케네문자인 선형 B문자의 해독으로 미케네 문명의 담당자는 그리스인의 선조라는 것이 확인 되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하였다. 그들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하였고,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부강한 맹주격이 되었다. 미케네는 미노아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테세우스의 전설은 미노아와 그리스 본토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원전 15세기 중엽에는 미케네가 크노소스를 지배하게 된 것 같으며,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후에는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되었다. 트로이전쟁(기원전 1240~30; 일설에는 기원전 1260경)은 전설과는 다르게 강대해진 그리스 본토의 소왕국들이 미케네를 맹주로 결합하여 소아시아로 진출한 대원정이었다. 미케네는 기원전 12세기에 결국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족에 의하여 몰락하였다.
미케네는 미노아와는 달리 상무적이며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정치적으로 공납제를 기초로 한 왕정으로 호메로스에 나오는 그리스왕들에 비하여 약한 평이었다. 공유지와 사유지가 공존해 있었고 공유지의 존재는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며 사유지의 존재는 평민이 경제적 자립을 누리고 있으며, 미케네의 국왕이 오리엔트적 전제군주화하는 것을 억제하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미케네인들도 제우스나 포세이돈 등의 후대 그리스 사람이 믿었던 신들을 믿었으나 미노아인들이 믿었던 뱀의 여신을 더 신봉했던 것 같다. 미케네의 사회구조는 국왕 밑에 귀족적인 전사계급이 있었고 다음에 관료인 서기, 그 밑에 상인과 농민이 있었으며 최하층에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미케네 사회는 오리엔트 사회와 그리스 사회의 중간형 이었다.
[편집]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편집] 자연환경
그리스의 기후와 지세는 지중해형 기후에 속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골짜기나 평지는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조건이 폴리스라는 소단위의 국가를 성립시킨 주요인이다. 그리스의 이러한 지형이 그리스인으로 하여금 바다로 진출케 하였다.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여 겨울에는 약간의 비가 오며 냉기가 돈다. 이런 환경으로 언제나 물의 부족이 고민거리였다. 이러한 기후로 그리스 일대는 포도와 올리브가 가장 중요한 농산품이었으며 소규모의 목축을 수반한 다각적 농업경영이 지중해 일대의 농업특색이다. 이렇듯 자연환경이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찌기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포도주, 올리브와 공산품은 매우 중요한 물자였다.
[편집] 폴리스의 성립
도리아족이 남하했을때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선형 B문자도 사라졌다.도리아족이 많은 혼란을 일으키며 남하했을때 그리스인 일부는 에게해의 섬과 소아시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소아시아 해안지대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고 부르거니와 그들은 미케네 문명의 유산을 지니고 있었고 오리엔트 문화와의 접촉이 용이한 곳이어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해안 지역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미케네 사회가 붕괴된후 그리스 본토에는 3개 내지 4개부족으로 구성된 소왕국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단위는 개별가족으로 구성된 촌락공동체였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미약하였으며 토지소유에 있어서도 미케네와는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Kleros, 분배지)의 소유자로서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폴리스 형성은 도리아족의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그렇기는 하나 여러 촌락의 중심시로의 집주로 폴리스가 성립한게 전형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이를 도시국가라고 불러서 큰 잘못은 없다.
폴리스의 중심이 되는 도시는 대체로 해안으로 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이었다. 도시안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건립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언덕 또는 산이 있으며 아크로폴리스에 인접해서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이 있다. 이 곳은 시장인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동활동의 장소이며 사교의 장이기도 하였다.
폴리스 성립 당시 중심시로 모여든 사람은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또는 상인들이었고 농민은 촌락에 머물었으며, 귀족도 그 근거를 그대로 농촌에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 성립이전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폴리스 전체가 하나의 시민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노예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자유인과 외국인(metics)도 완전한 의미의 시민은 아니었고, 오직 폴리스를 형성하는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내지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이었다. 이러한 것을 염두해 보면, 폴리스는 종교적.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의해 규제되는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폴리스는 고전기에는 본토에서만도 200개가 넘고, 소아시아로부터 에게해와 지중해일대에 건설된 식민지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그 넓이는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부르고, 이민족인 바르바로이(Barbaroi)와 구별하였으며,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시를 통틀어 헬라스(Hellas)라고 하였다. 폴리스들은 델피의 아폴로(apollo)신전을 중심으로 근린동맹(Amphictyony)을 맺고, 기타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여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은 서로 전쟁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동족의식이나 부분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끝끝내 도시국가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편집] 식민생활과 사회의 변화
폴리스가 성립한 기원전 8세기에는 호메로스 시대의 왕들이 사라지거나,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가 되버렸고 정치권력은 귀족에게 넘어갔다. 촌락을 단위로 한 부족적인 성격이 강한 왕정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은 귀족들이 편의상 중심시로 집주하였다. 이것을 폴리스의 성립과 귀족정치를 연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귀족은 평민보다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혈통과 가계에 있어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시대에는 중무장을 한 1대1의 전투 방식이 있었다. 말의 사육이나 중무장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를 부담할 수 있는 귀족이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그들은 신이나 영웅, 또는 왕의 후예들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들의 출신인 것이다.
평민 중에는 약간의 수공업자와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대다수는 클레로스, 즉 분배지를 소유한 중.소농민 이었다. <노동과 세월>(Works and Days)을 쓴 헤시오도스 (Hesiodos)가 귀족의 부정한 재판등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폴리스의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적인 성격과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 농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에서 귀족지배에 동요를 가져온 것은 식민운동과 그로 인한 폴리스의 사회 경제적 변화였다. 그리스 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약 2세기에 걸쳐서 활발한 해외진출과 식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멀리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니아 해안 까지 진출하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식민시는 프랑스의 맛실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네아폴리스, 비잔티움등 이다.
해외진출과 식민운동의 동기로는
- 사회의 안정에 따른 자연적인 인구 증가.
- 정권을 장악한 귀족층 내부의 갈등과 붕쟁.
- 귀족과 같은 대지주의 압박을 받은 소농내지 빈농의 토지에 대한 갈망.
- 해상무역을 확대하려는 욕망.
- 해외로 진출하려는 개척자적인 모험심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이 건설된 식민시는 일반적으로 출신도시의 정치적 지배를 받지 않고 저마다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출신도시의 방언, 정치제도, 관직명 등을 거의 그대로 따라했으며 따라서 둘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긴밀한 유대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식민시를 비롯하여 흑해로부터 서부 지중해에 걸쳐 범그리스 세계가 성립하게 되었다.
식민시와의 접촉이 잦아짐에 따라 해상무역이 왕성해지고, 기원전 7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로부터 화폐가 전해지자, 상공업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화폐경제에 입각한 상공업의 발달은 농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은광은 국가의 소유였으며 개인들에게 임대되기도 하였다. 채굴방법도 매우 우수하였다. 대규모의 과수 재배가 일어나게 되어 이런 경영의 발달은 소농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 내지 노예가 되는 농민의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농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도시의 평민들은 귀족정치에 도전하게 되었다. 평민세력의 대두에는 전술의 변화 또한 못지 않게 작용하였다. 중장보병의 밀집대가 전의 귀족을 대신하여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중무장의 비용은 각자 부담 이었으므로 유산시민에게 한정되었다. 귀족만이 전투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도시의 유산시민도 국방의 주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전술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평민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편집] 귀족정치의 동요와 참주정치
아테네 귀족정치의 중심은 집정관인 아르콘(archon)과 아레오파구스(areopagus)회의였다. 집정관은 처음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이었으나, 후에 9명으로 증가하고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오구스파회의의 의원이 되었다. 아레오파구스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며 귀족 지배의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고, 집정관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아테네에서 귀족에 대한 평민의 도전이 격화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경이다. 기원전 7세기 무렵 드라콘(Dracon)의 중벌주의(重罰主義)로 유명한 법전을 만들었으나 오히려 평민의 도전을 격화시켰다.
기원전 594년에 솔론(Solon)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로 인하여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을 골라서 400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만들게 했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정자'라고도 불리었다.
솔론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내부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는 최초의 대외전쟁인 살라미스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 전쟁의 지도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61년에 평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참주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에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은광을 개발하여 시민의 세금 부담을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매우 과감한 것으로서 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참주정치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전술의 변화로 귀족지배가 동요하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된 상황을 이용하여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독재적인 정치를 행한 것을 말한다. 결국 귀족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정치현상이었다.
[편집]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정복에 의해 건설된 폴리스이고, 정복에 의해서 영역을 확대시켰기 때문에 아테네와 같은 사회동요는 없었다. 도리아족이 남하하였때, 원주민 중에서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자는 운신은 자유롭지만 시민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perioikoi)가 되고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자는 헤일로타이(heilotai)라는 노예신분이 되었다.
헤일로타이는 시민과 국가가 요구하는 공납을 납부하는 부자유한 몸이었다. 그들의 수효는 스파르타 시민에 비하여 엄청나게 많고 반란의 위험이 많았다. 신분과 거주지를 달리하는 페리오코이와 헤일로타이를 바탕으로 이뤄진 스파르타의 특이한 사회구조는 두번에 걸친 메세니아전쟁을 통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이 전쟁후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의 주민 대부분을 헤일로타이로 만들고 그 토지를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평등한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분배하였다. 그리하여 스파르타 시민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되고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국제(國制)는 기원전 9세기에 전설상의 입법자인 리쿠르구스(Lycurgus)가 제정하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메세니아 전쟁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의 소산이었다.
스파르타의 국제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는 장로회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지만 이는 20세 이상의 성년남자 시민전체로 구성되는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실권은 에포르에게 있었다. 에포르는 집정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한는 것이기 때문에 감찰관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치의 유제(遺制)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부는, 성년남자의 전원이분배지를 가진 동등자로서 중장보병의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를 중장보병민주정(重裝步兵民主政)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전 주민의 5%~10%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로 언제나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스파르타는 쇄국주의,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시민의 생활을 전시체제나 다름없이 조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시민은 태어났을때 심사를 거쳐 불구나 허약한 경우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버림을 받았다.
이러한 스파르타 시민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훌륭한 전사가 되는게 인생의 목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일상용품의 생산과 상업도 페리오코이의 부담이었고, 화폐는 사용하기 불편한 철제(鐵製)였다. 외국과의 무역은 가능한 억제되어 자급자족(自給自足)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러한 생활체제에서 학문이나 예술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의 폴리스를 망라한 펠로폰네소스동맹(기원전 560년 경)을 결성하고 그 패자로 군림하였으나, 그리스 문화에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았다.
[편집] 페르시아전쟁과 아테네의 민주정치
[편집]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그의 개혁의 목표는 종전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관계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네의 전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새로운 행정구역을 마련하였다.노예와 외국인을 제외한 모든 구민을 등록케 하고, 등록된 구민에게는 핏줄이나 재산 또는 직업에 관계없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아팃카를 3개의 지역집단으로 구성하고 각 집단 내의 행정구를 몇개씩 묶어 10개의 중간행정구역으로 조직한 다음, 각 지역집단으로 부터 1개의 중간행정구역, 즉 3개의 중간행정구역으로서 하나의 행정부족으로 구성케 되었으며, 그 결과 아테네는 전체로 10개의 행정부족으로 구성되었다.
20세 이상의 시민권을 가진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는 500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하고, 사법권은 500인회와 동일한 선출방식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원이 보유하였다. 귀족정치의 유제인 집정관과 아레오파구스회의가 그대로 존속하고, 집정관은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부유한 상위 두 계층에서 선출되었으나 그 권한은 점차 축소 되었다. 유명한 도편추방법은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편에 적게하여 그 수가 6000개이상에 달하면 해당인물을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치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편집] 페르시아전쟁
폴리스들은 서로가 반목을 하고 있었으므로 소아시아의 강대국인 리디아가 페르시아에게 굴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노렸으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참주지배하의 이오니아 식민시들의 반란으로 본토 진출을 주춤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09년 페르시아군은 마라톤에 쳐들어왔다. 아테네와 적대적인 폴리스들은 이를 이용하려 하였고, 스파르타는 구원병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선전으로 아테네는 승리하게 된다. 가죽을 사용한 갑옷등이 등장하고 가벼운 헬멧의 사용으로 농촌이나 도시의 중산층에서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마라톤의 승리에서는 '달리는 중장보병'의 역할이 컸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침입하였다. 적과 내통하는 자로 인해서 큰 타격을 입기도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는 대승을 거둔다. 다음해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이간시키고 재차 아팃카를 점령하여 아테네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에 스파르타도 많은 구원병을 파견하고 각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서 페르시아를 대파함으로 그리스는 승리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전쟁은 동방의 전제정치에 대한 폴리스의 자유적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의 승리는 유럽역사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편집] 아테네제국
일단 페르시아를 이기기는 했으나 동방의 전제국가로 건재하며, 그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마안가서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해상동맹인 델로스 동맹인 탄생하였다. 규약에 의하면 동맹시는 일정한 병력과 함선을 제공하거나, 그것이 불가능 할때는 자금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네는 동맹시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제국의 길을 택하였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테네 내부의 사회경제적인 이유에서이다. 동맹을 해체하고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해상동맹의 공납금과 해상무역에서 아테네의 패권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아테네 경제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편집] 아테네의 민주정치
상공인의 경제적 지위나 발언권도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하여 기초가 마련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후에 더욱 발달하였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오파구스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후에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시대가 완성된다(기원전 457~429경).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500인회의 권한이 민회에 제출할 의안의 준비와 민회에서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오파구스회의 권한을 완전히 누른것이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 거듭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수당제의 확대와 국고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다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한정하는 시민권 제한법을 만들었다(이는 로마와 아주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국정에 참여 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적으로는 많은 수가 참여하는 민주제는 아니었으나 평등한 정신에 입각한 민주제였다.
이러한 민주제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을 경우에는 아테네식의 민중지배가 쉽게 혼란에 빠지고, 이른바 중우정치로 타락할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다.
[편집]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의 쇠퇴
[편집]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트 및 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트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30년간 평화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테네는 코린트시와 상업상 이해관계의 충돌에 있는 식민시 코르키라와 동맹을 하게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에 28년간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이길 공산이 매우 컸었다. 그러나 뜻밖의 재앙을 만나서 큰 피해를 입게된다. 승패도 없이 전쟁을 계속하다가 니키아스의 평화가 맺어진다. 그러나 전쟁중에 계속되고 있던 제국내의 분열이 계속 일어나는 것을 방치했다가는 제국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함으로 아테네는 기필코 승리를 얻어야만 했다. 지도자로는 알키비아데스가 추천되었다. 그는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정적들의 사소한 고발로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스파르타로 도망가 그 계획의 전부를 말해버린다. 이것은 아테네에게는 매우 큰 타격이었다. 페르시아와 조약을 맺은 스파르타는 흑해의 차단에 나섰다. 여기에서는 아테네는 너무 많은 피해자를 내게 된다. 결국 지도자는 쫓겨나게된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테네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모든 해외 재산을 포기하며 많은 성들이 파괴된다.
[편집] 그리스의 쇠퇴
스파르타의 후원 하에 아테네에는 30인 참주 정치가 시행되나 그들의 공포정치는 반항을 불러 일으켜 얼마 안가서 민주정치가 회복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제국들에게 아테네가 걷었던 것보다 고액의 공납금을 요구하고 마침 페르시아의 분쟁을 틈타서 소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를 틈타서 아테네 외 제국들은 동맹시를 규합하여 테베를 중심으로 결합하였다.
아테네는 제2차해상동맹을 결성하고 테베와도 동맹을 맺었으나, 테베의 급신장으로 동맹도 곧 깨진다. 메세니아가 해방되고 스파르타는 그 지도력을 상실하여 곧 테베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테베는 아테네와 같은 재력이나 문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지도자의 전사로 곧 패권도 사라지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테베/스파르타 사이의 패권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주지않고, 개별적인 폴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려는 분립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폴리스 상호간의 대립과 분쟁을 격화시킴으로 그리스 정치정세를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정치의 혼란과는 달리 경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발전하는 듯 보였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으며, 아테네의 '올빼미은화'등과 각 폴리스들의 풍부한 화폐는 상업과 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리스는 원래 자원이 빈약한 곳으로 많은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기원전 5세기의 인구증가는 이러한 경향을 촉진 시켰다. 그러나 식민시나 외국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로 해외시장이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이러한 해상무역의 축소는 실업자를 증가시키고, 빈민을 축소 시켰다. 폴리스들은 불안한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직을 싫어하며, 군역을 기피하기 시작하여 용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의 폴리스들은 본래의 시민공동체라는 성격을 점차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신흥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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