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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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宋美齡 한어 병음: Sòng Měilíng,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한국식 한자 이름으로 송미령은 세 명의 쑹 자매중에 한 명으로,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다. 중국에서는 "권력을 사랑한 사람"으로도 알려졌다.
상하이에서 감리교 목사출신의 사업가인 찰리 쑹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나, 8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기숙사 학교를 다녔다. 1917년 월슬리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철학 부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 장개석을 처음 만났는데, 장개석이 그녀보다 11년 연상이었고,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했지만, 장개석이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면서 결혼을 허락했다.
쑹메이링은 신생활 운동을 시작하며 중국 정치에 활발하게 관여하게 된다. 장개석이 장군이 되고 국민당의 총수가 되며 쑹메이링은 영어 번역가, 비서, 조언자로의 역할을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하던 쑹메이링은 중국과 서방의 문화에 모두 익숙해 양국 모두에서 개인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조셉 스틸웰은 그녀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리라고 예측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미국 방문중에 3만명의 인파를 모았고, "올해의 남편과 아내", "용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타임지의 표지를 두 차례 장식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중국사람 최초로, 그리고 여자로서 두번째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게 된다.
1949년 중국 내전에서 남편의 정부가 패배한 후, 그녀는 남편을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나 그녀의 언니(혹은 동생) 쑹칭링은 중국 본토에 남아 중국공산당을 지지했다. 내전 이후에도 쑹메이링은 중화민국의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국제 적십자사의 후원자, 대중국 영국 연합 원조 기금(British United Aid to China Fund)의 명예의장, 최초의 권리장전기념회원이었다. 1960년대 말에는 계속적으로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었다.
1975년 남편 장개석이 죽은 후 활동을 줄이다가 1978년 타이완에서 미국 롱아일랜드의 가족 소유지로 이주해 왔다.
1995년에는 캐피톨 힐에서 마련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50주년과 그녀를 기념하는 자리에 오랜만에 나와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0년 대만의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쑹메이링이 보냈다고 하는 자당의 후보 찬리엔을 무소속 후보 제임스 쑹보다 선호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공개하여, 그 편지의 진위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그녀는 2003년 3월 5일 자신의 106번째 생일을 맞았으며, 1998년 이래 거주해 오던 뉴욕시의 맨해튼의 자신의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