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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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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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712년 ~ 756년 | |
왕 비 | {{{왕비}}} |
황 후 | 폐황후 왕씨 정순황후 원헌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예종 |
다음 왕 | 숙종 |
당나라의 제6대 황제 |
당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수공(垂拱) 원년 9월 8일~ 762년: 상원(上元) 3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목차 |
[편집] 초기 생애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 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편집] 개원의 치
현종 이융기는 1년 뒤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의 치세인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嵩), 한휴, 송경, 장구령, 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융기는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이 밖에 한휴는 언제나 이융기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 한다.
이융기는 또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융기가 재위 초기에 얼마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융기는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한다.
이융기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현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심지어, 나라에 가뭄이 돌자, 이융기는 황궁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치를 하자 당의 국력은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편집] 양귀비의 등장
이러한 치세가 계속되자, 당현종 이융기는 거만해졌고, 충언하는 대신들을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을 떨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중용하였다. 또, 이원을 세워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융기는 유능한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를 승상으로 임명했는데, 이임보는 무식하고 무능한 인간이지만 아첨에 뛰어나서 이융기의 총애를 받아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임보는 이융기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19년간이나 국정을 전횡한 간신배이다.
더구나, 737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마저 죽자, 방황하던 이융기는 어느 날, 한 여자를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녀가 바로 수왕비 양옥환이었다. 양옥환은 이융기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융기가 그녀를 자신의 13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리하여 745년, 이융기의 나이 61세 때에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된다.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자리였던 지라, 당시 황후가 죽고 없던 차에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저 유명한 양귀비이다.
[편집] 양귀비 일가의 전횡
현종 이융기는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녀의 숙부와 세 명의 친오빠에게도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양귀비의 세명의 언니를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그 세도가 매우 어마어마했다.
이융기는 그 중에서도 양귀비의 셋째언니 괵국부인에게도 반해, 그녀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를 질투한 양귀비가 괵국공주는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에 노한 이융기는 양귀비를 궁에서 내치기까지 했다.
이 양귀비의 일가 친척 중에서 가장 세도를 누린 사람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이다. 양검은 이융기에 총애를 받아 이융기에게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승상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국충도 소인배요 간신배인지라, 충신은 죽이거나 내치고, 아첨꾼들을 이융기 옆에 붙여놓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있었는데, 양국충이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양귀비와 이융기의 관계를 화해시키려 했고, 이융기는 결국 그 화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같이 화청궁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녀의 육체를 본 이융기는 다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편집] 안록산과 양귀비
747년, 이융기는 절도사 안록산이 장안으로 오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고, 여기서 안록산과 양귀비가 처음 대면을 하게 된다. 안록산은 이융기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었고, 변방의 국방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양귀비는 늙은 이융기가 싫어졌을까. 그녀는 이제 체구가 우람한 안록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 승상 양국충은 안록산의 등장으로 점점 위기감을 느꼈고, 이융기에게 안록산을 모함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는 언제나 안록산을 변호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권세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편집] 안·사의 난
천보(天寶) 14년인 755년, 안록산은 변방으로 돌아가,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이융기와 양귀비, 양국충과 그 일가 친척들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이융기를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자, 병사들은 그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갈겼다.
이들은 이융기가 쉬고 있던 역관에서 계속 시위를 하자, 신하 위견소, 위방진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이융기 자신이 그들을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고력사 역시 선택이 없다 하자, 이융기는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이융기를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에서 황제에 오르고, 이융기를 태상황으로 삼았다.
[편집] 쓸쓸한 최후
757년 12월, 태상황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5년 뒤인, 762년 5월에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붕어하니 그 때 나이 78세였다.
시호는 현종 지도대성대명효황제(玄宗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편집] 가족관계
[편집] 황후와 후궁
- 폐황후 왕씨 (廢皇后 王氏)
- 정순황후 무씨 (貞順皇后 武氏) <원래 칭호 무혜비(武惠妃)>
- 원헌황후 양씨 (元獻皇后 楊氏) <원래 칭호 양귀빈(楊貴嬪)>
- 양귀비(楊貴妃)
- 황보숙비
- 조여비
- 유화비
- 전비
- 황보덕의
- 무현의
- 곽순의
- 동방의
- 유첩여
- 고첩여
- 유재인
- 염재인
- 진재인
- 정재인
- 고재인
- 상재인
- 종미인
- 노미인
- 왕미인
- 두미인
- 조야나희
[편집] 자녀
[편집] 아들들
- 담왕 이종 <郯王 李琮> (뒤에 봉천황제<奉天皇帝>로 추숭.)
- 영왕 폐황태자 이영 <郢王 廢皇太子 李瑛>
- 황태자 이형 (당 숙종) <皇太子 李亨>
- 체왕 이염 <棣王 李琰>
- 악왕 이요 <鄂王 李瑤>
- 견왕 이완 <甄王 李琬>
- 광왕 이거 <光王 李琚>
- 하도왕 이일 <夏悼王 李一>
- 의왕 이수 <儀王 李璲>
- 영왕 이교 <潁王 李璬>
- 회애왕 이민 <懷哀王 李敏>
- 영왕 이인 <永王 李璘>
- 수왕 이모 <壽王 李瑁>
- 연왕 이분 <延王 李玢>
- 성왕 이기 <盛王 李琦>
- 제왕 이환 <濟王 李環>
- 신왕 이황 <信王 李瑝>
- 의왕 이자 <義王 李玼>
- 진왕 이규 <陳王 李珪>
- 풍왕 이공 <豊王 李珙>
- 항왕 이전 <恆王 李瑱>
- 양왕 이선 <涼王 李璿>
- 판애왕 이경 <汴哀王 李璥>
원래 7명이 더 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편집] 딸들
- 영목공주
- 상분공주
- 효창공주
- 당창공주
- 영창공주
- 상산공주
- 만안공주
- 상선공주
- 회사공주
- 진국공주
- 신창공주
- 임진공주
- 위국공주
- 진양공주
- 신성공주
- 초국공주
- 창락공주
- 영령공주
- 송국공주
- 제국공주
- 성의공주
- 의춘공주
- 광녕공주
- 만춘공주
- 태화공주
- 수광공주
- 낙성공주
- 신평공주
- 수안공주
[편집] 연호
전 임 아버지 당 예종 이단 |
제6대 중국 당나라 황제 712년 - 756년 |
후 임 3남 당 숙종 이형 |
전 임 아버지 당 예종 이단 |
중국 황제 712년 - 756년 |
후 임 3남 당 숙종 이형 |
당나라 황제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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