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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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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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지휘관 | |||
김종오 준장 | |||
병력 | |||
국군 6 보병사단 |
성천-개천-희천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23일에 국군 6 보병사단 7연대가 북조선 18사단의 1개 연대를 물리치고 희천을 점령한 전투였다. 7연대는 이 전투에서 1개 연대 규모의 북조선군을 물리치고, T-34 전차 20여대와 화차 6량분의 보급품을 탈취했고, 6사단이 속한 2군단은 강계-만포진 선과 온정리-초산 선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본래 6 사단은 평양 탈환 임무를 부여받고 평양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백선엽 장군의 국군 1 보병사단과 미국 24 보병사단, 미국 1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미국 1 군단이 공격하고 있었고, 국군 1 사단이 평양 출신으로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백선엽 장군의 기지로 먼저 진입하여 소탕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6사단의 평양 진격은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도 나오는데, 백선엽은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열정 정도로 취급하고 간단하게 넘어갔다. 유재흥 2군단장은 평양 탈환 소식을 접하고 6사단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성천에서 순천, 개천을 거쳐 희천까지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6사단은 다음과 같이 조직되어 있었다.
- 2군단 군단장 유재흥 소장
6사단은 전쟁 초기에 춘천 지구 전투에서 북조선군의 남침 작전 계획의 한 축을 좌절시키고, 결국 북조선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무르게 하여 결국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한 시간을 버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단이었다.
10 월 20일, 6사단은 7연대와 2연대를 공격부대로 내세우고, 19연대를 예비로 돌려 작전을 개시했다. 순천에서 패주하는 북조선군을 차단하고 미군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한국 전쟁 중 첫번째 공수작전을 실시한 미국 187 공수연대전투단와 조우했다. 그러나 순천의 북한군은 이미 도주한 뒤라 두 부대는 적이 미처 챙기지 못한 보급품을 노획하며 무혈로 순천을 점령했다. 개천도 특별한 교전없이 점령한 6사단은 마지막 목표지였던 희천에서 후퇴하던 적군을 발견하고 교전을 했던 것이다.
희천을 점령한 국군 6 사단은 부대 정비 후 다시 초산 방면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첫번째 공격 목표를 고르고 있을때였다.
[편집] 참고 문헌
- 전쟁기념관 전쟁사 정보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년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