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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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 장군이다. 유교 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에서 밀려난 후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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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일대기
- 1316년 -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에서 태어남
- 1352년 - 조일신의 난 진압
- 1354년 - 원의 요청으로 홍건적 진압을 위해 출병
- 1355년 - 원으로부터 귀국
- 1357년 - 동북면체복사
- 1358년 -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伏兵)을 이용하여 격파
- 1359년 - 홍건적의 1차 침입. 서경이 함락당하자 생양(生陽), 철화(鐵和), 서경, 함종(咸從)등에서 적을 격파하여 몰아냄
- 1360년 -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로 임면
- 1361년 -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됨. 이 해에 홍건적 2차 침입(10만명).
- 1362년 -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패배시키고 개경 수복. 같은 해, 재상 김용(金鏞)의 역모 진압. 공민왕은 그 전해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
- 1364년 - 덕흥군을 왕으로 내세운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지금의 선천에 주둔하자 이성계와 협력하여 최유를 몰아냄
- 1365년 - 강화도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남
- 1371년 - 신돈이 처형된 후 복직.
- 1373년 -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임면
- 1374년 - 명이 제주도산 조랑말 2000마리를 요구하였는데, 제주도에 있는 몽고인 목호들이 300필만 내놓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함.
- 1375년 - 우왕 판삼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면
- 1376년 -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여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하자, 출정을 자원하여 홍산(鴻山:지금의 扶餘郡)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됨.
- 1377년 - 도통사로서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 1378년 - 현재의 풍덕천인 승천부에서 왜구 침입 격퇴.
- 1379년 -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림
- 1380년 - 수시중(守侍中)이 됨.
- 1384년 - 오늘날 국무총리 벼슬인 문하시중이 됨.
- 1388년 - 두번째로 문하시중이 되다.
- 1388년 - 3월에 팔도 도통사가 되어 옛 고구려 땅인 요동 정벌에 나섬. 그러나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게 모든 것을 빼앗김.
- 1388년 - 12월 개성 순군옥에서 죽음
[편집] 생애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唯淸)의 5대손인 최영은 16세 때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원직(元直)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고, 공민왕 원년(1352년)에 조일신(趙日新)의 역모를 진압하여 이름을 알렸다.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던 고려는 1354년 원나라로부터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조정군(助征軍)을 보내라는 요청을 받고, 39세의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병력 2,000명과 함께 출정케 했다. 원나라에서 대기 중이던 고려인 20,000명을 합류시켜 지휘하였으나, 정작 최영은 무훈보다는 대륙의 정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공민왕의 뜻이기도 했다.
1355년에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잃었던 땅을 되찾고 서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양(遼陽)에 이르는 실지 회복에 나섰다. 참고로, 쌍성총관부 전투에서 등장하는 자가 바로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다. 최영은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를 되찾을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이후 고려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전주 이씨인 이들의 조상은 무신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의 셋째 아들이었다.
원나라도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홍건적과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공민왕(恭愍王)을 밀어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자,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1364년에 고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 침략도 최영이 처리하였다.
그러나 최영과 고려가 맞서 싸워야 했던 적은 원나라만이 아니었다. 북에서는 홍건적이, 남에서는 왜구가 창궐하였다. 그 후로도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고, 1376년에는 연산의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최영은 이러한 공로와 경륜으로 1388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수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같은 해에 있었던 요동정벌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그의 생애도 마감하게 된다.
[편집] 민간신앙화된 최영 장군
무속에서는 ‘최영장군’이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의 추자도에 최영의 사당이 있다. 상추자도 추자초등학교 북서쪽 벼랑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당은 제주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영이 1374년(공민왕 23년)에 제주도에 있는 몽고인 목자을 토벌할 목적으로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또 토벌 종료 후인 9월 23일부터 10월 10일까지 추자도에 머물렀는데, 이 사당은 이때 주민들을 많이 도와준 최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편집] 최영 장군의 묘
최영 장군의 묘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1976년부터 풀이 돋았다고 한다. 현재 개풍군 덕물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