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목차 |
[편집] 정의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권을 기반으로 권력을 얻기위해 등장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 들의 병력을 뜻한다.
"군벌"주의 등의 표현에서 쓰이는 사전적 의미의 군벌과 일본 군벌 (군바츠) 등과 분리 분류 하기 위하여 중국 군벌 항목을 두었음 .
[편집] 북경 지역의 북양 군벌
중국의 군벌을 말하자면,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의 북양군이 자주 거론된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북양대신 (北洋大臣)으로 임명되면서, 그 후 북양군을 형성하는 등으로 동북 삼성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북양군벌이라는 명칭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서 따 온 이름이다. 1909년에 위안스카이는 잠시 해임되어서 군권을 잃지만, 북양군은 이미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다. 북양군은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위안스카이의 기반이 되어 주었으나, 위안스카이가 1915년 12월에 무리하게 중화제국의 황제를 자칭하다가 극렬한 비난 속에 실각한 후, 북양군은 북양 군벌 계파별로 갈라지며 "군벌들의 전국시대"라고 할만한 치열한 내전을 시작한다.
북양군벌은 여러 차례 심각한 내전을 벌이며, 그 와중에서도 두 차례 국공합작을 행하는 등의 유명한 여러 역사적 사건의 주체가 된다. 북양 군벌에는 계파에 따라서 직예 군벌, 안휘 군벌, 봉천 (봉계) 군벌 등의 파벌이 있었고, 이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 서로 전쟁을 벌인바 있다.
[편집] 지방 군벌
-->
[편집] 쑨원과 군벌들의 관계
쑨원 참조.
[편집] 내전의 시대
1916년부터 계속된 이러한 군벌들의 심각한 내전은 1928년 장제스가 북경에 진입할 때가지 계속된다. 1928년 이후 표면적인 내전은 종식되지만, 서로간의 반목과 의견차는 1950년 대, 장제스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집] 중국 군벌을 보는 각 국의 견해 차이 :주:
관계된 시간과 인원수, 그리고 정치적 방대함과 처절한 피해에 비하면 중국 군벌 각 계파 사이의 전투 및 내전에 대한 정보는 우리 나라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로는, 군벌이 과거 우리 나라의 정부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대만 정부의 과거 역사이기 때문이고, 초기 군벌의 친일 문제와 중국에서 말하는 "대만 문제" 등을 이유로 현재의 본토 중국과 대만이 중국 군벌을 해석하는 견해가 사뭇 다르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중국 군벌과 전투를 벌인 바 있는 일본 군벌 (관동군)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현대적 견해 조차도 중국과 대만의 그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1930년대 부터 비공식적으로나마 중국 군벌과 군사적 관계를 가진 바 있는 미국의 견해 역시 이 들 3 국과의 견해와 다소 차이가 있으다. 중국 군벌과 계파, 장군 및 주요 인물의 정보를 가장 많이 공개하고 있는 것은 일본판 위키이며, 중문판 위키는 본토 중국의 간자로 쓰여진 내용과 대만계의 번자로 쓰여진 내용이 약간의 관점적 차이를 두고 있다. 또한, 가장 영문판 위키는 비교적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이 많지 않다.
중문 위키와 영어 위키, 일본어 위키 등을 참조해서 (의견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공정하게 쓰려고도 했지만,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 연대표를 제외한 "사건들의 해석"에 대하여 (정치적, 외교적, 혹은 언어적 성향때문이라도) 그 자신들이 중국 군벌과 관계된 사실을 보는 시각이 미묘하게 (또는 극명하게) 다르다.
그 중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장쉐량 (張學良 장학량)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1936년 시안 (西安)에서 장제스를 감금하고 제 2차 국공합작을 유도한 그의 행적을 두고, 최근까지 대만에서 준 그에 대한 평가는 배반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1937년부터 10년간 투옥되었다가 출감한 후, 국민당에 의해서 억류되어 있었으며 1991년까지 대만에서 자택감금되어 있었다). 반면, 중국이 묘사하는 그는 민족의 구원자 또는 애국지사이다. 1928년에 아버지가 관동군에게 폭사된 후 친일 성향에서 강경한 항일 성향으로 노선을 바꾼 그를 보는 일본의 관점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 우연한 "언어의 관습적인 차이"일 수 있으나, 그가 장제스를 구금한 일을 중국은 시안사"태", 대만은 시안사"변", 일본은 시안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분류: 정리가 필요한 문서 | 중국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