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롱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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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롱스트리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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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1월 8일 ~ 1904년 2월 2일 | |
제임스 롱스트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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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지필드 카운티 |
죽은 곳 | 조지아 주 게인스빌 |
충성 | 남부동맹 |
최종 계급 | 중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미국-멕시코 전쟁 미국 남북전쟁 |
기타 이력 | 오트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 철도청장 |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1821년 1월 8일 ~ 1904년 2월 2일)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로버트 리의 오른팔이자 북버지니아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참전한 미국의 군인이다. 전쟁 후에는 전쟁 중 적들이었던 사람들의 정부에서 철도청장, 대사 등을 역임하며 남부 재건 계획을 지원했다. 그의 이런 전향은 과거 전우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게티스버그 전투 당시 리와 의견충돌을 빚었고, 전투 3일째인 피켓의 돌격 당시 소극적 자세를 보여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롱스트리트는 웨스트포인트를 1842년에 62명 중 54등으로 졸업했다. 그의 사관학교 동기이자 룸메이트가 율리시스 그랜트였는데, 사촌여동생 줄리아 덴트를 그랜트에게 소개했고, 그 두 사람은 결혼했다. 전쟁 전 그랜트와 이런 관계는 전후에 롱스트리트가 북부와 다시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되었고, 과거 남군 장성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스칼라와그(공화당에 가담한 남부인을 일컫는 말)가 되었다.
졸업 후에는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며, 소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중에는 제1차 불런 전투에 사단장으로서 처음 전투를 치렀고, 이후 북버지니아군에서 군단장이 되어 끝까지 리의 곁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전쟁 후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 시절,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오트만 제국 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편집] 게티스버그 전투 논란
리가 사망한 후, 롱스트리트는 회고록을 통해 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전쟁을 치렀던 옛 전우들도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 논란이 된 것은 게티스버그 전투 당시 소극적 지휘와, 전쟁 후 북부 공화당에 가담한 것이었다. 가장 강력한 비판자는 북버지니아군의 포병사령관이었던 윌리엄 펜들턴과 주벌 앤더스 얼리였다. 두 사람은 게티스버그 전투의 패인을 롱스트리트때문이라고 비난했고, 남부의 간행물 <Confederate Veteran>은 "게티즈버그에서 리를 무찌른 것은 미드가 아니라 롱스트리트였다(Longstreet, not Meede, defeated Lee at Gettysburg)"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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