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포로수용소 폭동사건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1952년 5월 7일)은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났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L.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6월 10일 도드 소장은 무사히 구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