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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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11월 15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마리를 하라는 내용의 칙령이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태자와 함께 먼저 머리를 자르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단발하도록 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이를 청천벽력으로 받아들였다.
"손발은 자를지언정 머리는 못자른다"는 유생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사회적으로도 큰 혼란을 야기했다. 유교 윤리가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조선사회에서는 "신체·머리털·살갗은 부모에게서 불려 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말 그대로,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이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내리자, 백성들은 이것을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고 이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당시의 조선은 동학농민운동과 뒤이은 청일 전쟁으로 온통 쑥대밭이 돼있었고 급기야 1895년 10월에는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당하고(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넉달후인 1896년 2월에는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아관파천) 등 비참한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단발령 강요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했고, 또 단발령이 일본을 본따 만든 제도라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반일의식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으로 촉발된 반일 분위기는 전국 각지의 의병운동으로 전개됐고, 을미사변과 함께 의병운동의 결정적 기폭제 구실을 했다.
결국 당시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된 단발령 강요와 이에 대한 백성들과 유생들의 저항으로 김홍집 내각은 국정개혁을 결실시킬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대신에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한 친로(親露)내각이 등장하게 됐다. 새 내각은 그 동안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고, 각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단발령은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