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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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金昌淑, 1879년 ∼ 1962년 5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교육가, 정치가였으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라 한다. 다른 이름으로 김우(金愚)라는 이름도 사용한 적이 있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한 김창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진회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또 체포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 이것이다.
이후에도 김창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선전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류하여 <한국독립후원회>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 결성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만주/몽고의 황무지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이곳의 개간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운동으로 600여명 유림들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의 나석주가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1927년 5월 병으로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에 입원중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뒤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옥중 투쟁을 벌였고,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구속되어 수감 중에,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정당난립과 신탁통치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 등으로 다른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기 시작했다. 대신 교육과 유림계 재건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미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한 바 있던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 기존 성균관을 정비하고,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기치로 명륜전문학교를 병합, 1946년 9월에 성균관대학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의 향교를 규합해 성균관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며, 그뒤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으며,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는 이시영. 조병옥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같은 해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시문집인 《심산만초》《벽옹만초》등이 있고,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회상기》등의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심산유고(心山遺稿)》로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