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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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독일어: 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 출신의 혁명가, 경제학자,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칼 맑스, 칼 마르크스란 표기도 많이 쓰이지만 표준 표기법에 따른 철자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사회주의시월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의 이론적 기반을 마르크스에게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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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학창시절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랍비였다. 마르크스의 가족은 유대인이었으나 1824년 개신교로 강제개종하였다. 트리어의 김나지움(고등학교)를 나온 뒤 마르크스는 처음에 본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베를린으로 옮겨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논문은 훗날의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좌익헤겔학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다. 좌익헤겔학파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신학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주의적 철학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후에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적인 요소를 모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역사철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당시 독일의 대학에는 헤겔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적 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적 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편집] 졸업 후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언론에 투신하여 라인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에 철학적 사고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민들을 취재하던 도중 물질적 경제적 이슈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좌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편집] 프랑스 생활
독일에서 급진 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거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Bund der Gerechten)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유물사관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게 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편집] 영국 망명 생활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적 유물론에 대한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혁명이 발발할 수 밖에 없는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에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League ofthe Just'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속에서 공개적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얘기한 것--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확언했다.--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까지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되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거꾸로 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어가고 있었던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금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파가 분열된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Engels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 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런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사상이 역사에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유물사관이다. 유물사관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편집] 마르크스의 사상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기본적 가설(명제)는 무엇인가?
①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변형하며 노동과 생산에 종사한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산관계를 맺게 되고 그것은 사회적 생산관계에 조응된다.
- 마르크스의 전 이론에서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명제이다. 생산력은 생산을 가능케하는 생산수단(도구와 원료)와 노동력을 이용해생산자가그것들을 생산발생케하는 것들을 일컬으며, 생산관계 란 생산과정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속에 맺어지는 모든 관계의총화이다. 생산관계의 가장 중핵적인 내용은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권과 잉여가치분배까지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권은 생산관계의 법적 형태이다. 첫번째 명제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물론의 기본적인 전제인 인간사회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생존이며 그것을 위해 노동과생산을 한다는것이다.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산관계라는 조건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②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화를 경제적 토대(기초) 라고 한다.
- 이를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기초(또는 생산양식)에 기초하여 상부 구조가 형성된다. 무엇이 상부 구조이고, 하부 구조인가? 마르크스는 상하부구조간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상부구조는 법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모든것들이며,하부구조는 경제적 기초(물적 토대)이다. 사회적 성격을 구성하는 핵심은 물적 토대위에 있으며, 그것이 상부구조를 어느 정도 규제하고 있다. 물적 토대가 사회적 정신적 생활일반을 제약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철학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자칫 확대 해석하면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자, 경제결정주의자라고 까지 부르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③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간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한다. 생산양식의 발전의 추동력을 설명하는 명제이다. 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는가? 어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일정단계까지 발전하면, 기존의 생산관계간에 충돌이 일어나며, 새로운 생산관계가 형성될때까지(혁명적 전환이 일어날때까지)계속된다.생산력은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한번 형성된 생산관계는 잘 변하지 않는다. 생산력의 게속되는 발전/변화에 대한 생산관계의 적응은 한계가 있고, 거기서 생산관계는 지속적인 생산력 발달을 막는 질곡이 되고 모순이 심화되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새로운 생산관계가 등장하게 된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사이 모순과 갈등은 사회혁명의 징표이다.
여기까지의 명제에서는 인간이란 요소가 상당히 배제되어 있다.
④ 계급투쟁이 하나의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전하게 하는 동력이다.
-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명제이다. 세번째 명제와 어느 정도 충돌하는 듯 보여지기도 한다. 계급은 마르크스에 있어서 생산관계의 구체적 표현형태이다. 소유제에 기초한 생산관계가 계급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 갈등과 모순이 인간사회에 표출될 때는 계급간의 대립, 투쟁으로 표출된다고 여겼다. 이렇게 볼때 마르크스는 세번째와 네번째 개념이 충돌되지 않는다고 여겼다.계급투쟁을설명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약간의 유보적인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생산의 경제적 조건의 실질적 변화와 생산관계 등(하부구조의 변화)은 자연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탐구될 수 있다.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변화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상호조응되어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상부구조를 가지고 하부구조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⑤ 성공적인 이행이란 그 이행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이 있을때 가능할 수 있다.
- 여기서 이행이란, 생산양식의 변화이다. 이행은 주관적으로 되어질 수 없다. 이행을 위한 물질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협의로 해석하면 러시아/중국/제3세계의 혁명등은 물질적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진 非마르크스적 혁명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어떤 사회질서도 그 사회질서를 존재하게 하는 생산력이 발전할 여유가 있는 동안은 그 사회 질서가 무너지지않는다. 새롭고 더 높은 단계의 생산단계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낡은 사회의 태반속에서 형성되어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회주의를 낳게 하는 조건은 형성/성숙된다.
⑥ 역사는, 역사를 생산력의 확대와 발전으로 보았을때, 진보적이다(역사의 진보).
-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이나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대체로 사회구성체와 관련된 명제이다. 고대적 생산양식에서 중세적 생산양식, 근대적 부르죠와 생산양식의 단계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 이다. 도대체 어디에 넣어야하는가? 유럽역사의 어디에 넣어야 하는가?
⑦ 공산주의는 모든 사회적 적대의 종말과 인간해방의 단초를 이룬다.
-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면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서구학자들은 마르크스가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별하였다. 19세기 사회과학자들에서 과학은 객관적이고 엄밀한 인간의 의지,주관, 사상따위와는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진행되어지는 법칙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를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객관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도래에 관한 법칙성을 규명했다고여겼기에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으며, 그 이전 사회주의는 주관적으로 성사키셔 보려했기 때문에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명제 속에는 증명해 낼 수 없는 모호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서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의 과학성에 대한 비판을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마르크스의 과학이란 19세기 과학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두번째, 마르크스의 이론은 당대이론에 비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개념의 모호성을 들 수 있다.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양식등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모호하며, 이론적 차원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이론 자체가 모호성을 띠고 있다는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혁명의 도래시점을 들 수 있다. 생산관계가 생산력발전에 족쇄로 작용하여 갈등이 심화되고 사회혁명이 도래한다고 했는데,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느 시점에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분명치 않은 것이다.이런 점에서 그의 이론의 과학성 에 대해 비판이 있다.
세 가지 측면으로 마르크스 가설를 정리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물질적 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를 유물론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마르크스ism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그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만드는 것이 바로하부구조라고판단해야 한다. 만일 그러한 기본적 가설을 부정하거나 전혀 다르게 해석해버리면 마르크스ism이라고 하기 어렵다.
둘째, 사회와 역사의 변화발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모순과 갈등을 강조하는 것과 상호협력과 균형, 조화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전자의 입장이다. 물론 갈등과 모순이 마르크스의 특허는 아니다. 모순 갈등의구체적형태로써 계급투쟁을 제시하는 독특성을 마르크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급간 화해와 협조와 조화를 주장하는 것은수정주의적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전부 다 모순/갈등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초기 관계는서로모순/갈등적인 것은 아니다. 계급 간 협력과 조화를 완전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 에지나지않으며, 근본적인 추진력은 역시 계급 갈등과 모순 이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단계적 , 비연속적 역사 발전의 법칙성이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갈때에는 사회적조건의 성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공상적이라고 취급한다. 역사에서 비약과 도약은 과학적 마르크스ism에서는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비연속적이고 단절적인 혁명적인 과정으로 보는것이다. 역사 발전 과정을 보는 마르크스의 견해와 Kuhn의 지식의 발달과정을 보는 견해의 공통점이다.
역사의 각 단계는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며 그 이행은 축적적, 연속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폭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역사의 발전과정을 점진적, 진화론적으로 본다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파문의 대상이 될 것이다.그리고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하면 인간해방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부정하게 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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