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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위키백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한 바오로 2세
속명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임기 시작 1978년 10월 16일
임기 종료 2005년 4월 2일
전임 요한 바오로 1세
후임 베네딕토 16세
탄생 1920년 5월 18일
사망 2005년 4월 2일
소년 시절의 카롤
실제 크기로
소년 시절의 카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Ioannes Paul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I)는 제264대 교황(재위: 1920년 5월 18일-2005년 4월 2일)으로 27년 간 로마 가톨릭을 이끌었다.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폴란드어: Karol Józef Wojtyła [?])이다. BBC는 그를 두고 "중세 시대를 제외하면 요한 바오로 2세만큼 당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황은 없다"고 평가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남부의 바도비체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비역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1929년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1932년 의사였던 형 에드문드가 성홍열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1941년 독일나치 점령하에서 아버지도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만능인이었다. 거의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만큼 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시작(詩作)활동과 연극활동에도 열중하였다. '롤렉(Lolek)'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대학교 입시 직전에는 유명한 폴란드 여배우가 주최한 스피치 페스티벌에서 시 낭송으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었으며, 학교 연극반에서는 주연 배우나 공동 제작자로 활약하였다. 8개 국어에 능통하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문학과 연극 활동은 대학생 시절에도 계속되어 시를 쓰고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으며,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도 늘 관람하고, 연극 단체를 만들어 주연 배우 노릇을 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도 크라쿠프에서 비밀 지하 연극 단체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연극 공연을 가졌다. 게쉬타포에서 가택 수색을 피해가며 약 30분짜리 연극을 아파트 같은 곳에서 30명 정도의 엄선된 관객들에게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끊임없이 문학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때로는 각본을 써보기도 했다.

그는 또 스포츠를 무척 좋아하여 축구의 뛰어난 골키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수영도 하고 고향인 바도비체 근처 언덕에서 스키를 즐기었다. 그는 스케이팅도 좋아하였고 등산과 카누도 자주 하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간이 이념과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깨달은 그는 당장 학업을 중단하고 1946년신부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다 1958년 폴란드 크라쿠프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1963년 크라쿠프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공산화된 조국 폴란드를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 정권의 핍박에 용감하게 맞섰다.

[편집] 재위 기간

1978년 이탈리아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455년만에 처음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인이자 슬라브계 사람으로써는 최초로 선출된 교황이기도 하였다. 그는 선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교황 요한 23세교황 바오로 6세의 의지를 이어받고 싶어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 비윤리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억압을 증오하여 이에 맞섰다. 특히 강대국들의 전횡과 전체주의의 압제에는 쉬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였다. 1981년 5월 13일에는 터키 출신의 메흐메드 알리 아그자(Mehmet Ali Ağca)의 총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후에 그는 암살 미수범인 아그자를 용서하여 그에 대한 사면을 요청했고, 아그자는 2000년에 석방되었다. 소비에트 연방KGB가 암살 기도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 2005년 3월에 빛을 본 문건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KGB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고국인 폴란드의 자유민주화 운동을 지지함에 따라 동유럽 혁명의 도미노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교황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동유럽의 공산주의권을 수차례 공격하여 끝내 도미노처럼 붕괴시키는 정치적 성과를 올려 민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동구권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와해로 인한 냉전 해체 이후에는 유일하게 남은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이 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국가사회주의와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대립 대신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새로운 위기로 부각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일방주의적 횡포인 경제 침략(신자유주의)과 군사 침략(이라크 전쟁)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번에도 극도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는 18세기 이후 러시아와 독일, 양대 강국에 의해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졌고 20세기엔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사상에 억압 받은 폴란드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마 그의 이런 성격을 만들었을 것이다.

종교와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정책을 견지하였다.

또 종교 간의 증오를 풀기 위해 다른 종교와의 화해를 하고 결연을 맺는 데에 많은 열정을 쏟기도 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로 대립하던 다른 종교들과 상징적인 화해를 한 셈이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2세의 행적은 다른 종교의 존엄성을 인정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1986년 로마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폴란드 문학에서 유래한 '오래된 형제'라는 단어로 유대인을 묘사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인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유대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2천년 동안 유대인에 가한 기독교의 범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은 당시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진전을 이루었고 7년 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받침돌이 되었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동서방 교회 대분열의 치유가 그의 오랜 숙원이라 밝히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루마니아, 그리스, 우크라이나동방 정교회 지역을 냉대를 무릅쓰고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에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방문하였으며, 1999년에는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을 만났고, 힌두교의 나라 인도를 방문했다.

실제 크기로

1994년 '3,000년을 맞는 칙서'를 통해 역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청이 과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불관용들과 불의에 대한 침묵(십자군 원정, 종교재판 등)을 인정하고 인류 앞에 사죄하여, 교회의 어두운 과거사 반성이란 업적을 남겼다.

1982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아르헨티나를 찾아가 종전을 설득했고, 1999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에도 특사를 파견하여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는 전세계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분쟁 종식을 위한 단식 기도를 했다.

1984년 5월 3일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전래 200주년 기념식을 맞아 방문했으며 대한민국의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는 방문 당시 한국의 역사책 번역본을 읽고 "혹독한 시련에도 민족의 정통성을 꿋꿋이 지켜온 한국의 역사가 모국 폴란드와 닮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 바오로 2세는 40여만 명이 모인 부산 강연에서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당시 정치 상황에서 볼 때 민감한 발언을 했다. 또 그는 방한 마지막 행사로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들과의 대화 시간에 '군사 정권의 폭압성을 알리겠다'며 젊은이들이 들고 온 최루탄 상자를 흔쾌히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 10월 5일-10월 8일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맞아 한국에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한국에 큰 사건이나 재해가 있을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왔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에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 때는 위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북조선 방문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00년 3월 로마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여 북조선 방문을 권유하자 요한 바오로 2세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교황청은 평양대주교를 파견하고 북조선에 수십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하지만 교황청이 북조선 방문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북조선의 로마 가톨릭 인정, 신부 입북 허용에 대해 북조선 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교황의 북조선 방문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편집] 말년

한편 탁월한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을 겸비했을 뿐더러 운동 실력까지 뛰어난 데다가, 재임기간 동안 129개국을 돌아다니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많이 하여 '신의 운동선수'로까지 불렸었던 그였지만 1996부터 파킨슨 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 외에도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을 앓으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하여 보행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되었으며 결장, 담석제거수술, 악성결장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치료를 받는 등 고령과 함께 건강 악화가 찾아왔다. 치세 말년에는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이 약화되면서 겹쳐져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다가 2005년 4월 2일 9시 37분에 바티칸 궁전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된 성 베드로 광장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즉시 성인으로 추대할 것(Santo Subito)을 요구하였다. 이같은 여론에 따라 신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죽은 뒤 5년 안에 개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성인 추대 절차를 이례적으로 앞당겨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인 추대를 위한 자료 수집을 공고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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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

[편집] 문장

삼층관 밑에 있는 파란 방패를 바탕으로 왼쪽 방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황금 십자가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Maria)의 첫 글자인 문자 M이 있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Totus Tuus'(온전히 당신의 것)를 사목 표어로 삼았었다.

[편집] 주요 저서

  • 《사랑과 책임》
  • 《쇄신의 기초》
  • 《막스 쉘러의 학설에 입각한 가톨릭 윤리 기초의 가능성》
  • 《모순의 징후》
  • 《은총과 신비》
  •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하나입니다》
  • 《우리는 아무도 혼자가 아닙니다》
  • 《추억과 정체성: 밀레니엄 사이의 대화》
  • 《여러분, 어디로 가십니까》
  • 《사랑은 하늘이 준 선물》
  •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 《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
  • 《일어나 갑시다》
  • 《2000년을 경축하라》

[편집] 회칙

  • 《인간의 구원자》 (Redemptor hominis), 1979.03.04
  • 《자비로우신 하느님》 (Dives in misericordia), 1980.11.30
  •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1981.09.14
  • 《슬라브인의 사도들》 (Slavorum apostoli), 1985.06.02
  • 《생명을 주시는 주님》 (Dominum et vivificantem), 1986.05.18
  • 《구세주의 어머니》 (Redemptoris mater), 1987.03.25
  •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12.30
  • 《교회의 선교 사명》 (Redemptoris missio), 1990.12.07
  • 《100주년》 (Centesimus annus), 1991.05.01
  • 《진리의 광채》 (Veritatis Splendor), 1993.08.06
  • 《생명의 복음》 (Evangelium Vitae), 1995.03.25
  • 《하나 되게 하소서》 (Ut Unum Sint), 1995.05.25
  • 《신앙과 이성》 (Fides et Ratio), 1998.09.14
  •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 2003.04.07

[편집]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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