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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 - 위키백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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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파리 시 교외에 위치한 베르사이유 궁궐의 거울방에서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초대 독일 황제로 추대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외에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하였으며 많은 전쟁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전쟁 후 독일-프랑스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적대적 사이가 되었다.

목차

[편집] 배경

명목은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와 엠스 전보 사건으로 표면화된 독일 - 프랑스 간 외교적 갈등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통일 독일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사실 오래된 사상이었으나, 먼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시급했기 때문에 뒤로 미뤄진 사안이었다.

[편집] 경과

[편집] 프랑스의 보상요구

주베를린 프랑스 대사인 베네딕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있기 전에 있었던 비아리쯔 회담에서 약속한 보상을 요구했고, 비스마르크는 요구사항을 문서로 제출할것을 요구한다. 프랑스는 벨기에룩셈부르크를 요구하는 문서를 만들어 비스마르크에게 준다. 비스마르크는 국왕과 협의한다면서 시일을 끌었는데, 그 사이에 런던 회의에서 룩셈부르크를 영세중립국가로 만들어 프랑스의 요구를 거절한다. 당연히 프랑스는 이에 항의했고, 아직 전쟁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프랑스에 작은 외교적 승리를 안겨준다.

[편집] 열강의 움직임

영국은 프랑스의 견제를 위해서 프로이센이 강대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식민지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벨기에 문제에 대해 나폴레옹 3세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앞서 전쟁에서 진 후유증을 수습하고, 전쟁 후 다시 봉기한 헝가리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을 선포하고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국내적으로 어수선한 상태여서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비스마르크로부터 1856년 파리 회의에서 결정된 흑해의 비무장화조약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에 프랑스의 동맹제의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1867년 4월경 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의하나 오스트리아는 기본적으로 발칸에 관심이 있었고, 반대로 프랑스는 발칸에 별 관심이 없었다. 또, 동맹에 이탈리아를 끌어들일 것을 오스트리아는 요구했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로마 문제로 대립 관계여서서 결렬되고 만다.

결국 이래저래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편집]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고 전쟁의 구실을 찾았다(또한, 전쟁은 비스마르크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단지 명분이 없었다).

이 무렵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는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한다. 레오폴드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레오폴드를 설득하여 왕위를 수락하게 했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

이것이 프랑스를 결국 자극했다. 전쟁도 불사한 프랑스의 외상 그라몽은 격렬한 반대를 했고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회한다. 비스마르크와 달리 빌헬름 1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주저하고 있었다. 7월 6일 나폴레옹3세는 육군상 르뵈프로부터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언받았고, 이를 믿은 나폴레옹 3세는 7월 19일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레오폴드가 스페인왕을 선택할 권리는 있으나,세력균형을 파괴할 수는 없다. 더욱이 프랑스를 위협할 수는 없다, 라는 것이 나폴레옹 3세의 생각이었다.

[편집] 엠스 전보 사건

전쟁 선포 전인 7월 7일 베네데티 대사가 빌헬름 1세의 휴양지인 엠스에 나타나 빌헬름1세에게 이런 일의 재발 방지를 확실히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빌헬름 1세는 그런 문제는 관심없다며 사실상 거절했다. 나폴레옹 3세는 평화와 프로이센의 항복을 바랬지만, 그랑몽과 파리 시민등 극우파들은 빌헬름 1세의 보장을 요구하며 실재적 행동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공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보다는 "보장"이 핵심 이슈가 되었다. 그라몽은 서면 보장을 요구하면서 Dead Line을 7월 12일로 하는 최후통첩을 발한다(이 날, 빌헬름 1세는 레오폴드의 에스파냐 왕위 수락을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다음 날인 7월 13일, 베네딕트와 빌헬름 1세가 우연히 회동하는데, 그 내용을 비스마르크가 내용을 왜곡하여 영국 신문에 공개한다. 내용이 베네데티가 무례하게 왕을 대한 것으로 되고 왕에게 모욕을 준 것으로 조작한 것이다. 이것이 독일인들을 격분시켰다.

7월 25일 자 런던 타임즈에는 베네데티가 벨기에 병합을 거론한 문서가 공개되는데 이 또한 비스마르크가 흘린 것이다. 나폴레옹3세는 이를 보고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원함을 알게 되었다. 영국은 놀라서 프랑스 및 프로이센과 서둘러 벨지움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편집] 전쟁 경과

프랑스국민이나 프러시아국민이나 그들대로 분노했고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다(7월 19일). 비스마르크는 방어전쟁임을 주장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세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파리시민들은 임시정부를 세우고 계속 독일군에 저항하지만, 4개월만에 항복하고 만다.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시가행진했고 1871년 1월 18일 아직 파리에선 굶주리고 추위에 지친 파리시민들이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을때 베르사이유의 거울방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포한다.→프랑스국민들에겐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1856년의 해협에 관한 협정을 파기선언한다.

[편집] 프랑크푸르트 조약

양국은 종전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조약(1871년 5월 18일)을 체결한다.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50억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2. 배상금 지불이 완료될때까지 프로이센군이 주둔한다.
  3.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을 프로이센에 할양한다.

[편집] 영향

1871년 1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가 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의 총리로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대륙의 중심국가로서 외교상의 중심 국가가 된다. 상징적인 사건으로, 1878년 러시아-터어키 분쟁의 조정을 베를린 회의를 통해 해결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회의는 대개 파리에서 개최되곤 했다.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 수상직에 있으면서 독일 제2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복수를 염려하여 재임 기간 중 복잡한 외교 관계를 형성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모든 외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외교 체계는 최소한 비스마르크 정도 되는 인물이 관리하지 않으면 유지되기 힘든 체제였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부분의 본문은 비스마르크 시대입니다.

프랑스는 전쟁 후 공화국을 선포했고, 나폴레옹3세는 퇴위했다. 그러나, 부르죠와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와 노동자, 사회주의자, 파리 빈민들이 주축이 된 파리 꼬뮌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파리 꼬뮌은 근대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으로,정부군의 무차별 학살과 투옥으로 진압당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침체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완전히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을 세우지만, 왕당파, 공화파, 사회주의자들 간에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부분의 본문은 프랑스 제3공화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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