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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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歸化)한 일본인으로, 귀화 후에는 자를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으로 지었다. 일본성은 사(沙), 본명은 야가(也可)이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이 사야가가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국 측에서도 조선왕조 실록에 2번 언급될 뿐이다. 그에 대해 그나마 언급된 것은 그 자신이 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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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김충선 (사야가)의 실체
김충선은 귀화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철포대"(일본에서 조총부대를 일컫던 이름)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잇다. 이 점을 근거로 일본 측 사야가 연구가들은 일본 전국시대때 와카야마 현의 "사이카"라 불린 철포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와카야마 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 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일본 소설가 고사카 지로도 그런 사람들의 한 명이다[2].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조선으로 출정했고, 출정 후 즉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나고야까지 100명을 이끌고 갔는데, 스즈키 혼자만 사라진 것이다.
이에 대해 사이난가쿠인 대학의 마루야마 교수는 사야가가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아니라 하라타 노부타네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반히데요시 세력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가토의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토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및 장수 명단에 사야가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던 하라타 노부타네는 있으며, 하라타 역시 출병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면서 그가 사야가라고 주장한다. 전사했는데 확인이 안되었거나 투항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3]
[편집] 임진왜란과 항왜 김충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들어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이때 사야가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4]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의병들과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1597년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울산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무관 정3품인 가선대부를 하사받기도 했다.[5]
[편집] 임진왜란 이후 행적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과 1636년(인조 4년)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워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이후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병자호란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적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대구(大丘;大邱)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편집] 후손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사성 김씨는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편집] 저서
-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있다.
[편집] 참고문헌 및 각주
[편집] 참고문헌
-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효형출판, (서울,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