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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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張錫周, 1849년 ~ 1921년)는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친일 인물이다.
함경남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여 수재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1882년 상경하게 되었고, 1883년에 신설된 통리아문 박문국에 채용되어 《한성순보》의 창간과 발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1]
그는 당시 개화파들이 일본의 도움으로 발행했던 친일 논조의 한성순보 발간에 참여하면서 친일파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갑신정변 실패로 잠시 폐간되었던 한성순보는 1885년 복간되는데, 이때 장석주는 주필을 맡아 주간 《한성주보》를 2년여 동안 발행했다.
보수파 득세로 인해 잠시 물러났던 장석주는 1894년 갑오경장 때 다시 복귀하여 1895년 김홍집 내각에 법부대신으로 입각했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실각하자 유길준, 조희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역적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었다.
19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이 성립하자 귀국하여 다시 관직을 맡았고,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건립과 추모를 위한 친일 단체 동아찬영회의 총재가 되었다. 비슷한 목적으로 이토의 송덕비를 세우고자 하는 송비건의소에도 가담했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을 인정 받아 남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던 전직 각료들은 대개 효용 가치가 다하여 수작 이후 공식 활동을 멈추는데 반하여,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조선독립소요의 사정과 원인〉이라는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여 만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건의할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였다.
3·1 운동 이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도진흥회, 동광회의 서울 지부(회장 박영효) 등 친일 단체를 결성하며 활동하다가 1921년 사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장인원도 함께 포함되었다.
- ^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돌베게, 1993년) 146쪽 (오연숙 집필 부분)
분류: 1849년 태어남 | 1921년 죽음 | 조선 말기의 정치인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