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첩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쿄 대첩(東京大捷)은 1998년 축구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B조 3차전 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홈팀이었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2-1로 역전승한 경기이다. 이 경기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축구 라이벌전이 가장 격렬하게 나타난 사례이다.
목차 |
[편집] 조 편성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아시아 대륙에는 3.5장이 배분되었다. 세 팀은 본선에 직행하고 한 팀은 오세아니아 대륙 1위와 플레이오프를 치루는 방식이었다. 최종 예선에 참가한 10개 팀을 5개 팀씩 A,B조로 나누었는데 대한민국은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함께 B조로 편성되었다. 본선 진출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 각조 1위 팀은 본선 직행
- 각조 2위 팀은 제 3의 장소에서 단판 경기 후 승자는 본선 직행
- 2위팀간 경기에서 패한 팀은 오세아니아 대륙 1위와 홈 앤드 어웨이 플레이오프 경기 후 승리한 팀이 본선 진출
[편집] 당시 상황
1996년 5월 31일에 FIFA 집행위원회는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축구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도록 결정했다. 이것으로 과열 양상을 보이던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개최 경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다음 월드컵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일본은 그때까지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94년 축구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도하의 비극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손아귀에 들어왔던 본선 티켓을 놓친 일본은 절치부심하고 이 대회를 준비했다. J리그 벨마레 히라쓰카의 선수였던 브라질 출신의 와그너 로페스까지 귀화시켜 대한민국을 반드시 이기고자 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최종 예선을 앞두고 매우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이 1996년 12월 16일에 열린 제 11회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게 2-6으로 대패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후임으로 임명된 차범근 감독은 대표팀을 추스려서 1차 예선은 통과했지만, 대표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앞선 두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바레인, 우즈베키스탄과의 홈경기를 모두 이겨 승점 6점을 획득했다. 일본의 경우 홈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는 이겼으나 UAE 원정에서 비겨서 1승 1무 승점 4점이었다.
[편집] 경기 내용
1997년 9월 28일 도쿄 요요기 경기장은 온통 울트라 니폰의 파란 물결이 넘실거렸다. 원정 응원을 온 약 5천명의 붉은악마는 파란 바다의 한조각 외로운 붉은 섬이었다. 대한민국 선수 소개부터 일본 관중의 야유가 터져나오며 경기는 과열 양상을 띄었다. B조의 선두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이 경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김병지, 홍명보, 최영일, 이민성, 유상철, 하석주, 고정운, 장형석, 이상윤, 이기형, 최용수를 선발로 기용했다. 이에 맞서 일본은 가와구치 요시카즈, 이하라 마사시, 와그너 로페스, 미우라 가즈요시, 야마구치 모토히로, 모리시마 히로아키, 소마 나오키, 나나미 히로시, 오무라 노리오, 혼다, 나카다 히데토시가 출전했다. 대한민국의 감독은 차범근, 일본은 가모 슈였다.
전반전은 0-0으로 마쳤으나 전체적으로 일본이 앞선 경기였다. 후반에도 그런 기세는 거의 이어져서 후반 10분 경에는 소마의 슛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선제골은 일본이 먼저 터뜨렸다. 후반 20분경 고정운이 수비 진영에서 불안정하게 공을 몰다가 야마구치에게 골을 빼앗겼고 이어서 골키퍼 김병지의 키를 넘기는 로빙 슛을 성공시켰다.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어서 일본팀은 승리를 지키기 위해서 로페스를 수비수 아키타와 교체했다.
그러나 일본팀은 공격수를 수비수로 교체한 후로 주도권을 잃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의 공격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특히 홈에서 2경기를 가진 대한민국에 비해, 일본은 이전 경기를 UAE 원정으로 치루면서 시차로 인한 체력적인 문제가 있었다. 차범근 감독은 이것을 고려해 후반에 승부수를 띄웠고 이것이 적중했다. 대한민국의 계속된 파상 공세가 이어지던 후반 38분경, 문전에서 누구의 머리에 맞지 않고 오른쪽 코너로 흘러나온 볼을 이기형이 길게 크로스했고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은 교체 투입된 서정원이 헤딩 슛으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 후로도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후반 41분경 역전골이 터졌다. 공격에 참여한 이민성이 최용수의 패스를 받아 중거리 슛을 날렸고, 공은 가와구치 골키퍼 앞에서 한번 튀어오르고 골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이후 대한민국은 일본의 공세를 잘 막아내서 2-1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편집] 결과
이 경기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축구를 통해서 폭발한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이미 도하의 기적을 통해서 축구가 가지는 내셔널리즘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 대중매체들도 선정적인 기사를 쓰면서 이와 같은 대결구도를 조장했다. 이와 같은 경쟁의식은 그후 한동안 계속 되었으나 2002년 축구 월드컵이 성공적인 공동 개최 이후에 한일 양국간의 이해가 높아지면서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다.
경기에 승리한 대한민국팀은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차범근 감독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하며 6승 1무 1패 B조 1위의 성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직행했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하면서 대회 도중 해임되었다.)
어이없이 역전패한 일본은 그 충격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가모 슈 감독을 비롯하여 선수와 축구협회에 수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다음 경기인 카자흐스탄과의 원정경기에서 1-0으로 이기다가 동점골을 허용하여 비겼는데, 이로 인해 조 2위의 자리까지 위태로와졌다. 이 때문에 결국 가모 슈 감독이 사임했고 나가누마 겐 축구협회 회장도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6경기만에 5승 1무로 승점 16점을 획득하여 본선 진출을 확정한데 반해, 일본은 그 후로도 B조 2위를 차지하기 위해 악전고투해야 했다.
후임이었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1997년 11월 1일 잠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여 기사회생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이미 본선 진출을 확정하여 동기 부여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일본은 조 2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에서는 대한민국이 일부러 일본에 져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이런 소문은 사실 무근이며 단지 대한민국의 경우 일본보다 동기 부여가 부족했을 뿐이다.) 이날의 승리를 바탕으로 일본은 B조 2위를 차지했고 A조 2위인 이란과 대결했다. 1997년 11월 16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이란과의 경기에서 연장 골든볼로 3-2 승리를 따낸 일본팀은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패배한 이란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와 플레이오프에서 2무승부를 기록하여 본선에 진출했다.
[편집] 바깥고리
- 1997년 98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 한국 vs 일본 - 대한축구협회의 한국축구명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