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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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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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1세(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는 제259대 교황(재위: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이다. 속명은 아킬레 암브로지오 다미아노 라티(이탈리아어: 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이다. 위엄 있고 집중적이며 학구적인 동시에 활동적인 교황으로서 선교, 외교, 내부 쇄신, 적응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편집] 생애
1857년 5월 31일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 데시오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성직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서 1879년 신부로 서품된 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철학, 신학,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고 밀라노 대신학교의 교수와 암브로시오 도서관원이 되었다. 1907년에는 도서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고문서학의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바티칸 도서관에서 일하였다. 처음에는 부관장으로, 1914년 이후에는 관장으로 일하였다.
1918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명령을 받아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폴란드에 교황 순시관으로 파견되었다. 1919년 6월에는 정식 교황청의 사절이 되었다. 그 해 10월 28일 레판토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폴란드와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안에서 교회와 국가의 여러 현황들을 접하고 그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경쟁과 국경 분쟁의 어려운 점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후 1921년 6월 13일 밀라노의 교구장과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베네딕토 15세의 선종 후 제14차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1세는 원래 학자 출신이라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였다. 그레고리오 대학교를 증설하여 성서학원과 동방학원을 겸하게 하고 그 대학교에 교회사와 선교학과를 신설하였다. 교회 학문을 일반 대학교 수준으로 높여 통일되고 종합적인 수준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925년에는 기독교 고고학 학원을 세웠고 바티칸 도서관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많은 로마 가톨릭 계열 대학교들을 신설하게 하였다. 바티칸 방송국과 바티칸 천문대를 신설하고 교회 음악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70년 이래 문제였던 로마 문제가 그의 치세 때에 타결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2년 반 동안 협상을 통해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조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27개 조항으로 된 협정과 45개 항으로 된 정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조약 체결로써 교황은 오랜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티칸 시국에서나마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1926년 최초로 중화민국 주교들을 서임하였다.
전 임 베네딕토 15세 |
제259대 교황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 |
후 임 비오 12세 |